래르몬또브(Lermontov/莱蒙托夫)의 文学庭园

레르몬또브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문학 批評]</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 알베르 카뮈의《페스트》</p><p class="ql-block"> ㅡ 부조리는 죽지 않는다</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rgb(1, 1, 1);">알베르 카뮈(Albert Camus) 프랑스의 소설가·극작가./출생-사망; 1913년 11월 7일, 알제리 - 1960년 1월 4일 /주요저서; 《이방인(異邦人)》(1942), 《전락(轉落)》(1956) /수상;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span></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rgb(1, 1, 1);">&lt;우리의 '폭력 작가들'과는 반대로 카뮈는 자신의 소설에서 방황하지 않았다. [...] 카뮈가 페스트를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는 밖에서 레지스탕스를 쫓는 나치의 총성이 울려퍼지는 동안 파리의 어두운 방안에서 불법 기사를 작성하던 점령기의 소름끼치는 밤에 피를 흘렸을 것이다.﹥ </span></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rgb(1, 1, 1);">ㅡ가브리엘 마르케스 ['폭력' 소설에 대한 의견] (1985).</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rgb(57, 181, 74);">전후 프랑스의 최고의 베스트셀러</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1940년 6월 14일, 독일군은 파리에 입성한다. 이어 8월 22일 프랑스와 독일의 휴전협정이 이루어지고, 프랑스 국토의 3/5이 나치제국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남동부의 나머지 지역에는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 괴뢰정부가 들어선다. 이 때 이제 막 프랑스 문단에 발을 들여놓게 된 알제리 출신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항독지하신문 &lt;콩바(Combat)&gt;의 편집진에서 일하고 있었다. &lt;콩바&gt;의 창간호는 "파리의 모든 총알들이 8월 밤하늘을 수놓는다"라는 글귀로 시작된다. 프랑스 국민들은 카뮈가 익명으로 쓴 &lt;콩바&gt;의 감동적인 사설들을 읽으며 그처럼 어려운 시기에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1944년 파리가 독일로부터 해방되자 &lt;콩바&gt;의 그 감동적인 사설들의 필자가 알베르 카뮈라는 사실이 알려진다. 당시 이는 센세이셔널한 일이었다. 그리고 1947년 역사적인, 그리고 예언적인 &lt;페스트(La Peste)&gt;가 발표된다. 카뮈의 소설을 향한 프랑스 시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일 수 밖에 없었다. &lt;페스트&gt;는 1947년 출간되자 한 달 만에 초판 2만 부가 매진되었으며, 그 해의 '비평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언론에서는 알베르 카뮈를 '무신론적 성자'로 찬양하면서 선전했고, 장 폴 사르트르는 하버드 대학에서 가진 강연에서 즉흥적으로 &lt;페스트&gt;에 대해 이야기했다. 심지어 &lt;페스트&gt;가 일으킨 파장 때문에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사전에 등재될 정도였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lt;페스트&gt;를 향한 이런 폭발적인 반응은 무엇보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보낸 프랑스인들, 그리고 유럽인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체험을, 카뮈가 그 특유의 담담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문체로 기술해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lt;페스트&gt;가 제2차 세계대전의 알레고리라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일이었다. '페스트'는 나치즘이고, 페스트로 폐쇄된 오랑은 나치에 포위된 파리이며, 리유와 타루의 자원봉사대는 레지스탕스를 의미한다는 것은 소설을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rgb(57, 181, 74);">르포르타쥬인가 우화인가?</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말하자면 &lt;페스트&gt;는 에리히 레마르크의 &lt;서부전선 이상없다&gt;와 같은 일종의 르포문학이었다. 그러나 카뮈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카뮈가 &lt;페스트&gt;를 구상할 당시 읽었던 소설은 허먼 멜빌의 &lt;모비딕&gt;이었다. 그에게는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는 르포르타쥬(reportage)가 아니라 그것을 우화와 알레고리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진짜 '소설'이 중요했다. 그는 이 알레고리의 재료로 '페스트'라는 소재를 택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하지만 페스트처럼 전근대적이고 고리타분한 유행병이 어떻게 20세기의 문명화된 도시 오랑 한복판에 번져나갈 수가 있단 말인가? 마치 프랑스 국민들이 조국이 나치독일에 순식간에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듯이 오랑 시민들도 페스트의 확산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카뮈는 기자출신답게 구체적인 통계수치와 저널의 공식적인 발표를 인용해서 페스트라는 사태가 독자들의 피부에 와닿도록 만든다. 그가 오랑이라는 도시 위에 설계한 특수한 시공간은 그 살과 피를 부여받기 위해 보다 치밀한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그렇다고 카뮈가 리얼리즘 소설을 쓴 것은 아니었다. 카뮈가 페스트로 폐쇄된 오랑을 그려나가는 방법은 발자크나 졸라 식의 리얼리즘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발자크식 리얼리즘은 작가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전형성을 꼼꼼하게 모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지중해 인간 카뮈에게 있어서 구체적인 묘사란 단순히 전쟁에 대한 미메시스가 아니었다. 카뮈는 오랑이라는 공간 위에 페스트로 폐쇄된 오랑을 재창조한다. 그리스인들이 상상 속에 살고 있는 올림푸스 신들을 눈에 보이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황금비율의 조각을 남겼듯이, 카뮈는 페스트라는 신화를 육화(incarnation)시키기 위해 치밀한 묘사가 필요했던 것이다.</p><p class="ql-block"><br></p> <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span style="color:rgb(57, 181, 74);">페스트는 죽지 않는다.</span></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듯이 페스트도 마침내 물러간다. 그러나 의사 리유는 페스트의 퇴각과 시민들의 환호를 지켜보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p><p class="ql-block">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 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 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이것은 인류의 운명에 대한 완벽한 코멘트이다. 페스트 혹은 부조리는 죽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바탕에 깔린 근본 조건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부조리야말로 인류의 역사를 이끄는 동력이다. 히틀러와 아우슈비츠가 사라지고 나면, 스탈린과 굴라그가 들어설 것이다. 카뮈는 마르크스적인 메시아주의가 제시하는 역사의 종말을 믿지 않았다. 부조리는 소멸되지 않을 것이고, 폭력 혁명 역시 또다른 폭력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카뮈의 모랄은 &lt;반항적 인간(L'homme révolté)&gt;으로 이어지게 되고, 결국 '지식인= 마르크시스트'나 다름없던 당시의 분위기에 의해 사장당하고 만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인간의 건강입니다."</p><p class="ql-block">말하자면, 카뮈는 부조리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현대인에게 냉정하게 죽음을 선고하는 주치의이다. 그건 카뮈가 환자의 죽음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달콤한 거짓을 말하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카뮈의 관심은 파시즘에 대항하는 '무신론적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속에서 사라진 인간의 몫을 다시 인간에게 되돌려주려는 데 있었다. 그 최소한의 몫은 파늘루 신부를 향한 의사 리유의 다음과 같은 대답에 간결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인간의 구원이란 나에게는 너무나 거창한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원대한 포부는 갖지 않았습니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인간의 건강입니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의사 리유의 캐릭터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개인을 구해내려는 카뮈의 진정한 페르소나이다. 리유는 '어린애들마저 주리를 틀도록 창조된'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고, 이 인간의 몫을 찾는 것을 신에게 맡기기보다는 '있는 힘을 다해 죽음과 싸워야' 한다고 믿는다. 추상적인 이데올로기들이 살육을 낳게 되는 과정을 지켜본 카뮈에게 추상성은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에게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 관념보다 중요했다. 이와 같은 카뮈의 믿음은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문장을 낳는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몸을 돌릴 만한 가치가 있는 건 이 세상엔 하나도 없지요. 그렇지만 나 역시 왜 그러는지 모르는 채 거기서 돌아서 있죠."</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카뮈의 글을 읽으면 카뮈와 악수하고 싶어진다고들 한다. 특히 이렇게 서정적인 문장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건 나치즘을 카뮈와 함께 겪었던 유럽인들 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끝)</p><p class="ql-block"><br></p><p class="ql-block"><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