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3><font color="#167efb"><br></font></h3><h3><font color="#167efb"><br></font></h3><h3><font color="#167efb"><br></font></h3><h3><font color="#167efb">"설봉컵" 생활수기응모</font></h3><h3><br></h3><h1><font color="#ed2308"> <설봉>과 <청산>에 깃든</font></h1><h1><font color="#ed2308"> 추억마당</font><br></h1><h1><font color="#b04fbb"> </font></h1><h3><font color="#167efb"> 성진숙</font></h3><h1> </h1><h3><font color="#b04fbb"><br></font></h3><h3><font color="#010101"> </font></h3> <h1><font color="#010101"> 경치도 좋고 살기도 좋은 우리 고향 통화산성(通化山城)에는 아름다운 인생이야기들이 많기도 하다. </font></h1><h1><font color="#010101"> 이제는 내가 고향을 떠난지도 오래고 무정한 세월의 세파속에 기억력도 가물가물 사라지고 있지만 </font>지금<span style="color: rgb(1, 1, 1);">까지도 내 기억속에 생생하게 살아있으며 영원토록</span> 잊지 못할 <span style="color: rgb(1, 1, 1);">추억마당을 펼쳐보고 싶다.</span></h1> <h1><font color="#010101"> 다행히도 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는 그해에 통화산골에서 태어나서 20세기 60년대 초부터 통화시조선족중학교에서 공부할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font></h1> <h1> 그런데 소학생때부터 소설책읽기를 무척 즐기였던 나는 중학생이 되자 소설책 읽기에 아주 인이 박혀버렸다.</h1><h1> 남들은 그 시대의 정치형세에 따라 과외시간이면 뢰봉을 따라배워 좋은일을 찾아한다고 열을 올리였지만 철모르는 나는 수업이 끝나기 바쁘게 조용한 구석을 찾아 소설책보기에 여념이 없었고 심지어 소설책에 끌리는 유혹을 이길수가 없어서 정치, 력사, 지리 등 부과시간이면 교과서는 책상우에 펴놓고 책상밑에서는 소설책을 훔쳐보군하였다. </h1> <h1> 중학교는 소학교와 달리 과목마다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다르고 부과목들은 매주일에 두시간씩만 수업하기에 과임선생님들은 제 시간이 되면 들어와서 강의만 하고 나가면 그만이고 나처럼 교실 뒤구석에 앉아서 소설책을 훔쳐보는 학생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것 같았다. 그리고 부과목들은 보통 기중시험과 기말시험만 잘 치면 되기에 그때마다 나는 외우기를 잘하는 우세를 발휘하여 시험치기 직전에 한바탕 외우고 시험을 치면 백점 만점에서 육칠십점쯤 얻기는 문제 없으니까 그런대로 공부를 견지할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부과목들 중에서 유독 지리과만은 제멋대로 할수가 없었다. </h1> <h1> 지리과목을 가르치는 리설봉 선생님은 그때 우리 중학생들에게 인기가 가장 높은 선생님이셨다.</h1><h1> 우선 그분은 자신의 이름자 설봉﹙雪峰﹚처럼 키도 기중 크고 얼굴도 히여서 눈덮힌 아아한 설봉을 방불케 할뿐만 아니라 사회상식과 지리지식도 상당히 높아서 모두들 설봉 선생님을 두고 〈지리박사>라고들 하였다. </h1><h1> 설봉 선생님은 지리 시간이면 교과서와 비과책은 들여다 보지도 않고 교단에 서서 도도하게 강의를 하면서 칠판에다 필요한 지도를 그리군 하는데 중국지도는 물론이고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지도까지도 신통하게도 똑같게 그려내는 통에 학생들의 찬탄을 자아 내군하였다. </h1><h1> 그리고 설봉 선생님은 강의한 내용을 수시로 학생들에게 질문하여 평시성적으로 적어놓군하니까 지리공부는 허투로 해서는 절대로 안되였다</h1> <h1>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책에 인이 박힐대로 박힌 나는 한번은 지리선생님 이 칠판에 돌아서서 지도를 그리는 틈에 책상밑에서 소설책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붉은 바위〉란 소설에 미쳐버린 나는 지리시간이란것도 까맣게 잊고 정신없이 소설책을 들여다 보는데 옆에 앉은 학생이 옆구리를 찔러서 흠칫 놀라 머리를 들어 보니 지리선생님이 저 앞 교단우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데 그 예리한 눈길이 내 소설책까지 와 닿은것만 같았다. 나는 가슴이 철렁하여 얼른 소설책을 걷어 넣고 강의를 듣는 척 하면서도 머리속에는 그냥 소설속의 영웅인물들이 맴돌이 치고 있었다.</h1> <h1> 그 다음 지리시간이 닥쳐오자 나는 설봉 선생님이 꼭 나를 질문할것만 같아서 전번시간에 강의한 내용을 미리 외워 두었다. 과연 선생님은 내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전번시간에 배운 내용을 지도를 짚어가며 말해 보라고 하였다. 나는 미리 외운것들은 졸졸 말하면서도 지도를 짚는것은 거의 다 틀리여 학생들의 웃움보를 자아내였다. 선생님은 나더러 죽은 공부를 했다면서 평소성적 십점제에서 오점을 주었다. </h1><h1> 이만하면 설봉 선생님께서 나한테 경종을 세게 울린 셈이지만 그래도 소설책에 박힌 인을 떼버리지 못한 나는 선생님들의 눈길을 피해가면서 소설책이나 훔쳐보군하다가 초중 2학년 학기말시험을 치고 보니 다른 과목들은 그런데로 다 급격은 했는데 유독 지리만은 기말 총평이 59점 이였다 !</h1> <h1> 아 ! 59점이라... 60점이면 급격인데 나는 글쎄 일점 모자라 낙제생이 되어버린거다. 학생으로서 이보다 더 기막히고 억울한 일이 어디있으랴! 글쎄 수학과목도 아니고 지리같은 부과는 어디서든 일점만 더 올려주면 급격은 되는데 어쩌면 마이너스 1점(-1점 )으로 낙제제생을 만들수 있나 말이다. 지리선생님이 참으로 야속하기 그지없었지만 찾아가 해볼수도 없고 공부를 그냥 하고 싶으면 다음 학기 개학하기 전에 학교에 가서 보과시험을 치르야만 하였다. </h1> <h1> 울며 겨자먹기로 무더운 여름 방학 내내 나는 지리과 보과시험 준비를 하느라고 전전긍긍하면서 지리교과서가 닳도록 보고 또 보아서 교과서의 내용을 전부 다 외울정도가 되였지만 마음은 불안스럽기 그지 없었다. 글쎄 학생으로서 보과시험장에 들어간다는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말이다. 그리고 수치스러운것 보다 더 무서운것은 내가 낙제생이 되어 보과시험 치러 간다는것을 우리 아버지가 아시는 날이면 당장에서 공부 그만 떄려치우라고 불호령이 떨어질텐데 … </h1><h1>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한심한 딸년을 불쌍히 여기셨던지 나는 부모님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보과시험 치러 학교로 갈수가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 와서도 선생님과 동무들을 만날가봐 두려워서 머리를 푹 수그린채 보과시험장으로 가는데 그야말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었다. 정말이지 내가 소학생때부터 공부를 꽤나 잘하였기에 우리 마을의 유일한 녀자중학생이 될수 있었고 어떤 애들이 공부를 못하여 보과생이 되는 걸 보면 내가 다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 오르는것 같았는데 어쩌다가 내가 보과생이 되여 버렸는가 말이다. </h1><h1> 나는 철없이 수업시간까지 소설책을 훔쳐보던 자신이 한없이 밉고 죽도록 후회되었자민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고 벙어리 랭가슴 않듯 아픈 가슴을 붙안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가는데 누군가 내 앞을 떡 막아 서는게 아닌가! </h1><h1> 머리를 들어 보니 바로 지리 선생님이였다. 우뚝 솟은 설봉같은 선생님을 우러러 보는 순간 나는 그만 참고 참았던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천만마디 말들이 용솟음쳐 올랐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소리쳐 울지도 못하고 서럽게 흐느끼며 눈물만 펑펑 쏟았다. 그런데 글쎄 한참동안 우는 내 몰골을 지켜보기만 하던 선생님께서 《그만 울고 돌아가시오!》하시고는 돌아서 가버리는게 아닌가! </h1><h1>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면서 눈물투성이 된 얼굴로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서 지리선생님이 왜 나더러 그만 돌아가라 하는가를 물어 보았더니 설봉선생님은 매 학생에 따라 독특한 교육방식을 쓰는데 너같은 학생한테는 이런 방식으로 혼떼미를 내줘야 정신차린다고 하셨다는 거다. </h1><h1> 정말 그렇다. 그동안 나는 소설책에 미쳐버려 남들이 다 드는 공청단에도 가입하지 못했고 담임선생님한테서 비평교육도 여러번 받았지만 고치지를 못하여 보과시험생까지 되어버린게 아닌가 !</h1><h3><br></h3><h3><br></h3><h3><br></h3> <h1> 과연 설봉 선생님의 마이너스 일점은 학생으로서 《불치병》에 걸렸던 나를 만구하였다. </h1><h1> 초중3학년때부터 나는 다시는 소설책같은데 빠져들지 않고 공부에 정력을 몰두한테서 진학히기 그처럼 어려운 세월에도 사범학교에 록취될수 있였으며 그래서 나는 46년간을 교단에 서서 소학생, 중학생, 대학생들까지 다 가르칠수 있는 영광스러운 인민교사로 성장할수 있었던 것이다.</h1> <h1><br></h1><h1> 2015년 9월 15일은 나의 모교 통화시조선족중학교의 70주년 교경절이였다. 나는 모교의 초청을 받고 교경절 기념행사에 참가하러 고향으로 찾아갔다. </h1><h1><font color="#010101"> 70년이란 유구한 력사를 가진 통화시조선족중학교는 교경절에 참가하러 온 조선족 인시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빛나는 인물이 리설봉선생님의 맏아들인 통화 청산그릅사장 리청산이였다. 그분은 그때 이미 통화시는 물론 전 중국 조선족 사회에까지 이름 떨친 기업가로서 우리 민족문화사업의 발전과 진흥을 위하여 수많은 공헌을 하였는데 이번 모교 교경절 70주년기념행사에도 20만원이나 기부하셨다고 한다.</font></h1> <h1> 교경절경축행사가 끝난 이튿날, 리청산 사장이 차를 보내여 우리 로교사대표들을 그의 회사로 요청한다기에 나도 청산그릅이 자리잡고 있는 통화현으로 가게 되었다. </h1><h1>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그 옛날 우리 집이 살던곳이 어디메인지 찾아 볼수도 없도록 변화한 현성거리에 일떠선 청산그릅이 현대화한 건축물과 시설들로 잘 꾸려져 있었는데 리청산사장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h1><h1> 리사장은 먼저 우리를 인솔하여 회사를 구경시키고 나서 우리를 어느 작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h1><h1> 거기에는 이미 작고하신 리설봉선생님을 비롯한 리씨기족 조상님들의 빈소가 차려져 있었다. 우리 일행은 경건한 마음으로 존경하는 리설봉 선생님의 유상앞에서 허리를 굽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h1><h3><br></h3><h3><br></h3><h3><br></h3><h3><br></h3><h3><br></h3> <h1> 점심시간에 우리는 청산그룹식당에서 준비한 푸짐한 술상에 둘러앉아 리청산 사장님의 창업사도 듣고 리설봉선생님을 회상하는 좌담회도 가졌다. 그 석상에는 리설봉선생님과 퇴직할때까지 함께 사업하시던 로교사님들도 계셨는데 그들의 말씀에 따르면 설봉선생님은 퇴직하기전에는 학교공회주석으로서 책임심도 강하고 사업열정도 높아 학교와 교직공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시는것을 인생의 락으로 삼으셨고 퇴직한 후에도 얼마안되는 퇴직금으로 〈설봉〉장학금까지 설치하여 우리 민족 교육사업에 기여하셨는데 그이가 세상을 뜨자 그의 아들 리청산 사장이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우리 민족교육사업과 민족문화발전을 위하여 크나 큰 공헌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h1><h1> 나도 그 얻기 어려운 기회에 중학생시절 리설봉선생님과〈마이너스 일점〉에 깃든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지만 시종 벌언기회도 얻지 못하고 아쉬운데로 떠나야 할 때 뜻밖에도 리청산 사장의 비서가 좌담회에 참가했던 매 사람들한테 오야카드〈欧亚卡〉한장씩 내주었다.</h1> <h1> 그 오야카드〈欧亚卡〉에는 인민페 천원씩이나 들어 있다고 하길래 나는 설봉 선생님과 청산 사장님의 고마운 은혜를 두고두고 잊지않고 기념하기 위하여 그 카드로 양룽(羊绒) 내복을 샀다. </h1><h1> 지금도 해마다 엄동설한 추위가 닥쳐오면 그 양룽 내복을 꺼내 입군 하는데 포근하고 따스함에 깃든 추억이 가슴에 사무치게 안겨오군한다.</h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