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옥탑 아래에 평화의 비둘기 노니네

云龙

<h3>백옥탑 아래에 평화의 비둘기 노니네</h3><h3> </h3><h3> 문운룡</h3><h3> </h3><h3> 일전 려순 백옥산 산정에 올랐을 때 눈앞에 펼쳐진 일련의 풍경들이 큰 감명으로 다가오며 나의 심벽을 크게 울렸다. 외세침략의 상징인 백옥탑과 그 아래 좀 높은 계단에 도렬해 누군가의 해설을 열심히 듣고있는 해군 신입병들(군사학원 학생일수도), 그들보다 좀 낮은 넒은 공터에 삼삼오오 떼를 지어 한가로이 노니는 평화의 상징 - 하얀 비둘기들, 그리고 산아래 운무속에 희여붐이 내려다보이는 군항(軍港), 마치 이 모든 것이 도시의 어제와 오늘을 일목료연하게 압축해놓은 듯 했다. 고요하고 아늑해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려순은 100여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로씨야, 일본 등 외세의 침략으로 얼룩진 비운의 도시이며 그 유명한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넋이 깃든 유서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h3><h3> 기실 나는 려순행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였다. 20대 후반 갓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 대학졸업을 앞둔 실습생들을 인솔해서 려순을 다녀간적 있다. 그때도 백옥탑을 찾았고 지어는 지금은 안전문제로 금지된 탑안의 계단을 통해 탑 관망대까지 올랐으나 이번 같은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아마도 세월의 루적으로 인한 생각의 깊이 또는 폭에서 오는 차이일 것이리라. 그리고 이번에는 필회차 문학회 회원들과 동행하여 감수와 의미가 또 다를수 있었으리. </h3><h3> 문학회, 나한테는 정감가고 또 유일하게 다니고 있는 협회조직이기도 하다. 기업인협회, 골프협회, 로교사협회, 녀성협회 등등 근년에 생겨난 그 많은 민간단체들을 아무리 둘러봐야 나로서는 모두 조건 미달이고 오직 문학회만이 그나마 가까스로 기댈수 있는 언덕이였다. 그렇다고 내가 문학에 타고난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되여 신문사의 문학면 편집을 맡게 되였고 또 어떻게 되여 문학글인 듯 아닌 듯한 아리송한 글 몇편 내여 그걸 밑천이랍시고 문학회에 '혼입'하였다. 혼입이든 가입이든 그렇게 쭉 15-16년간 활동하며 많은 회원들과 알게 되고 정을 쌓아가는 과정에 문학회는 이젠 나의 생활에서 빠져서는 안될 비타민 같은 활력소로 자리매김하였다.</h3><h3> 필회는 문학회 1년행사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활동이다. 금년 필회는 권춘철 회장을 선두로 한 협회 새로운 지도층이 선출된후 심양시조선족문학회에서 료녕성조선족문학회로 승격되여 갖게 되는 첫번째의 필회인만큼 더욱 의미가 크다. 그 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필회 내용이 알차고 풍성했다. 대련시 조선족기업인들이 통크게 후원했고 대련 출신의 문학회 회원들이 로고를 아끼지 않았다. 대련시 조선족 학자들의 보귀한 강좌는 회원들의 창작에도 크게 도움이 될 듯 싶었다. </h3><h3> 특히 이번 필회에 문학회의 '친정'이라 할수 있는 료녕성조선족련의회의 리홍광 회장이 고무적인 소식을 갖고 참석했다. 금년부터 문학회 문학상을 설치하며 이를 정례행사로 장기화할 것이라 했다! 산재지구의 우리 문학, 척박한 환경에서도 한걸음 한걸음 내디디며 성장할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고마운 분들의 지지와 갈라놓을 수 없다. </h3><h3> 려순일로감옥옛터와 려순일본관동법원옛터 방문은 나로서는 이번 필회에서 가장 기대했던 내용이라 할수 있겠다. 옛날부터 많이 들어왔고 전번 첫 려순걸음에는 미처 들리지 못해 큰 유감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 돌아보고나서는 차라리 안보기보다 못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무거웠고 침울해졌다. 그러나 오늘날의 평화가 어느 만큼 소중한가를 뼈 저리게 느끼려면 식민지배와 전쟁의 지난날이 남긴 잔혹한 리면과 참상을 외면해서도 안되는 것이 또한 오늘을 살고있는 우리들이 마주해야 할 책임이고 의무가 아닌가. 그리고 그 포악하고 암울한 시기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고 애오라지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위해 분투한 선렬들의 희생과 업적은 우리가 대대손손 망각해서는 안되는 사명이기도 하다. </h3><h3> 가끔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로운 삶에 대해 하늘에서 뚝 떨어진것 마냥 쉽게 여기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져보았고 이번 려순감옥을 돌아보며 그런 생각이 다시 한번 강렬히 떠올랐다. 그리고 평시 사석에서라도 장난 삼아 영웅과 선렬들에 대한 불경스런 언사는 없었는지 반성해보기도 했다. 국가에서 영웅과 선렬들을 모독하고 조롱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조례를 내온 것을 보면 그런 고약한 풍조가 사회적으로 일부 존재함을 말하는 것인데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수 없다. </h3><h3> 안중근의사가 갇혔던 감방을 들여다보며 한쪽 구석에 놓인 자그만 책상과 의자에 눈길이 갔다. 아마도 거기에 앉아서 자신의 자서전과 미완성 론집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던 것 같다.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도 절망에 빠질 대신 인생을 총화하고 론집 집필이 가능했던 그러한 초연함은 과연 어디서 생겼을가? 일개 참새가 대붕의 뜻을 가늠하려 하는 짓거리인 것 같아 스스로도 가소로움을 누를길 없다. 마음만 붕 떠 글 같은 글 한편 써내지 못하면서도 이런저런 조건타령으로 자신을 위안해온 나, 마음속에 울리는 게시가 크다. </h3><h3> 해변도시를 찾아온 이상 바다를 보지 않을수 없다. 우리가 찾은 곳은 금석탄황금해안이라 불리는 해수욕장으로 여기는 국내 16대 "건강형" 해수욕장줃 하나로 꼽힌다고 했다. 도시중심의 해수욕장에 비해 수질이 좋고 모래가 부드러운 등 장점을 지니고 있다. 대련시는 근년 삼색(록색의 산야. 푸른 색의 해수, 흰 색의 빙설운동 기지)도시란 새로운 아이템을 내걸고 도시를 보다 특색있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있다. 근데 우리들이 도착한 날이 가히 금년 들어 정점을 찍을수 있는 고온의 날씨이줄이야. 체감온도로 40도는 웃돌 것 같았다. 더더욱 이런 숱가마 날씨에 양 통마리 구이를 한다고 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으나 대형천막을 치고 그 밑에 죽치고 앉아 맥주에 곁들어 고기를 뜯으니 슬슬 잘도 넘어갔다. 이런걸 일러 이열치렬이라 했던가. 또 일부 회원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정수리를 지지는 해빛 아래서 배구경기를 하잔다. "사사오입 고래희"의 년장자들은 스스로 알아서 뒤걸음치고 젊은 패 (그래도 40 - 50대)들이 나서서 호기롭게 한판 붙었다. 헌데 공중에서의 오가는 뽈은 보이질 않고 지상에서의 "야, 야 _" 하는 고함소리만 소란스러운 것이 손팔로가 아니라 입으로 배구를 치는듯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떠리, 쪽빛 바다를 배경으로 마음껏 솟구치는 저 자유로운 몸짓, 푸르른 상공에 울려퍼지는 저 즐거운 비명, 페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저 통쾌한 웃음소리, 그것이면 족했다. 우리의 투사선렬들이 몸바쳐 추구하고 분투해온 가치가 바로 저런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위함이 아니였던가! </h3><h3>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로에 올라 뻐스 차창으로 저 멀리 석양 비낀 광야를 바라보노라니 불현듯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쏘다"란 영화에서 이등박문이 중국 동북평야를 달리는 렬차에서 밖을 내다보며 '참으로 드넓어'하며 군침을 흘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렬강의 유린을 당한던 그 평야가 지금은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수 없는 자유강국의 공업중심지로 부상하였으며 우리 조선족도 이 땅의 당당한 주인으로 자리잡았다. 그 과정에 우리 민족도 수많은 렬사를 배출했고 피를 흘렸다. 또 이 땅의 개발과 건설을 위해 마멸할수 없는 공적을 쌓았다. 또 이 땅의 방방곡에는 수많은 우리의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문학의 뿌리이고 터전이 아닌가 한다. </h3><h3> 2019년 대련필회 및 려순 문학기행, 나에게는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감으로 될듯 싶다.</h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