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3>수필</h3><h3> 말씨</h3><h3> 문운룡</h3><h3> 나의 말씨를 짬뽕에 비유하면 더없이 타당할 듯 싶다. 대체로 경상도 억양이지만 중간중간 함경도 냄새를 피우기도 하고 또 가끔은 평안도 투도 끼워넣는다. 방금 "니 뭐라꼬? 고만 치얏뿌라..." 해놓고는 "어째? 무시게라구?..." 그러다가는 또 "와기래?" 이런 식으로 같은 장소에서도 조선 팔도를 자유로이 '왕래'한다.</h3><h3> 나는 심양 태생이나 부모님 모두가 연변 출신이시라 어릴 때 나는 함경도 말씨를 쓴 것 같다. 어머님은 내가 밖에 나갈 때면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다녀야 한다며 거듭 당부했는데 번마다 안심이 안되셨는지 창문쪽으로 돌아갈 때를 기다렸다가 창밖을 내다보며 "운룡아, 손잡아!"하고 다시 한번 큰소리로 주의를 주면 나는 "양!"하고 짜증 섞인 소리로 대답하군 했다. '네'도 아니고 '응'도 아닌 그 중간의 이 '양'이 함경도에서 많이 쓰이는 응대의 한 표현인 줄로 안다. 동네 애들은 당시 나의 이 화법이 우습다고 "운룡아, 양!"하고 곧잘 따라하군 했다. 그러던 것이 소학교에 입학해서부터는 나의 말씨가 완전 경상도 쪽으로 기울어버렸다. 학생들 거의 백프로가 경상도 말씨를 쓰다보니 "니 머락카노?", "빨리 온나!" 하는 와중에 "양!"하는 대답은 기가 죽기 마련이고 대신 "뭐 아이다, 알았다카이!"하고 따라갈수 밖에 없는 노릇이였다. 이렇게 완전히 '문둥'이로 자리잡나 싶을 때 중학교 승학과 더불어 이번에는 평안도 '데무사니'들이 대거 합류하게 될줄이야. 후에 안 일이지만 '덩거당에 불이 번떡번떡하다'는 표현이 대학교 조문교재 례제로 실렸을 만큼 그들의 언어 파급력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당시 중소학교 선생님들의 말씨도 각이했는바 조문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중국 조선족 조선어문 수업은 평양을 기준으로 한다면서도 정작 자신은 '문둥이' 억양이 다분하였다. 대학 가서도 상황은 비슷했고 함경도, 경상도, 평안도가 삼도정립(三道鼎立)을 이룬 가운데 이번에는 수자적으로 함경도가 우세를 점해 모름지기 나의 말씨도 동년으로 '회귀'하는 듯한 경향을 보이다 졸업할 때까지 결국 '정체성'을 확립하지는 못했다. 고로 사회에 나와서는 바람부는 갈대마냥 나의 말씨는 장소와 상대자, 상황에 따라 경상도가 되였다가 함경도도 되며 또 가끔은 평안도 흉내를 내기도 했다. </h3><h3> 가끔 어느 지방의 말씨가 더 귀맛 당기냐가 화제로 떠오를 때가 있다. 물론 고향말씨 혹은 오래 사용해서 고향말씨처럼 되버린 언어에 정감이 가겠지만 생소한 타지방의 말씨에 더 매력을 느낀다는 사람들도 종종 볼수 있다. 나도 총각시절 연변을 가보면 젊은 아가씨나 색시들이 "이랬습니까, 저랬습니까"를 약간 변경시켜 "이랬습니꺄, 저랬습니꺄"로 발음하는 것까지 매력으로 다가온 시절이 있었다. 상냥스럽고 애교스로움이 배로 업그레이드 되는 듯한 느낌이였다. 그런가 하면 대학시절 연변의 남성동기들은 또 료녕 녀학생들의 "그랬시요, 이랬시요" 식의 평안도 말투에 끔뻑 가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각 지방의 말씨란 각각의 매력이 있는 듯했고 또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에 따라 감수도 다른 듯하다. 자기가 호감가는 사람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그 말씨가 어느 지방의 말씨든 꿀같이 들릴 것이요, 역으로 반대 상황이라면 귀에 거슬릴수도 있겠다 싶다. </h3><h3> 한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요즘 조선족들가운데도 '서울말씨'를 쓰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물론 제대로만 구사한다면야 자신들 말마따나 품위 있어보이고 교양 있어보이고 좀 좋으련만 억양만 약간 흉내낼 뿐 발성법이나 어휘선택 모두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묘하게도 '아니다'를 '틀리다'로 틀리게 쓰는 단어만큼은 용케도 같이 틀리게 쓰는 것이 희한하지 않을수 없다. 이를 일러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다'고 비유한다면 폄하로 될가? 그리고 서울사람 만나 배려의 차원에서 같이 서울말을 쓴다면야 경우가 다르겠지만 그 서툰 서울말을 중국에서 굳이 같은 조선족과 할 필요가 있을가? </h3><h3> 옛날 무슨 서류를 작성할 때면 관적(籍贯)이란 칸에 딱히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꼭 함경도라고 써넣군 했다. 게다가 부모님들이 쓰시는 말씨도 함경도, 차츰 함경도는 나에게 있어서 뿌리와도 비슷한 존재임을 의식했다. 이태전 그런 유서깊은 고장을 다녀올수 있는 행운이 차례졌다. 칠보산 관광길에 뻐스를 타고 북쪽 회령으로부터 청진을 거쳐 경성, 어랑, 명천을 지나 칠보산까지 쭉 돌아볼수 있었다. 연도의 특이한 꼬부랑 소나무 숲으로 우거진 동해안과 서쪽으로 멀리 보이는 병풍처럼 면면히 뻗은 함경산줄기는 함경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산수 수려한 자연풍경구와 다를바 없었다. 이러한 자연환경이 필경 함경도 말씨 형성에도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란 생각을 하며 눈앞에 펼쳐진 경관 하나하나를 놓칠새로 뇌리에 각인시켰다. 함경도란 유래도 우리가 들려 온천욕까지 했던 경성(镜城)과 칠보산 남부의 함흥(咸兴)이란 이름에서 따온 것이란다. 그곳 산천초목과 하나로 융합된 당지 사람들로부터 정통의 함경도 말씨를 접했을 때 가슴이 먹먹해짐과 아울러 마치 그동안 부평초마냥 떠돌다 먼 옛적 내가 살았던 본고장을 다시 찾아온 기분이 들기도 했다. </h3><h3> 서울말씨 혹은 평양말씨, 그리고 티묻지 않은 순수의 고향말씨를 옳게 구사함이 한 사람의 매력 향상에 플러스로 작용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그러나 '말이란 또 아가 다르고 어가 다르다'고 같은 고장의 말로 같은 내용을 전달한다 해도 화법에 따라 상대자에게 주는 감수와 기분은 천지차이다. 여기서 바로 그 '아'와 '어'가 포인트인데 '선택' 여하에 따라 말씨가 우아하고 부드럽고 상냥할수 있는가 하면 상스럽고 거칠고 투박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아'와 '어'의 갈림은 성품, 성격 등의 선천적인 요소도 일부 작용하겠지만 그보다는 후천적인 자아수련의 결과로 봄이 더욱 옳을 듯하다.</h3><h3> 최근 한국의 한 작가는 '모든 관계는 말투에서 시작된다'는 책을 편찬, 그는 저서에서 말투에도 메이크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있다. 상황에 맞는 말을 선택함으로 '그냥 나'를 '좀 더 나은 나'로 만드는 말투를 메이크업 말투라고 했다. 누군가에는 신뢰를 주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존경받을 만한 자격있는 사람으로 나를 만들어주는 말투이다.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신뢰를 얻고 싶다면 말투를 메이크업 해야 한다고 권고하고있다. </h3><h3>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고 지어는 살인까지 피할수 있게 한다고 했다. 천냥빚을 갚을수 있고 살인까지 피하게 만들수 있는 말 한마디, 어쩌면 말씨란 '포장'이 결정적 역학을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다.</h3><h3> 두루 횡설수설 하고나니 무한경쟁의 요즘 세월 말씨 또한 엄연한 스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또 어쩌면 나처럼 짬뽕 말씨가 장점으로 작용할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긍정사유도 해보게 된다. 여러 지방의 말씨를 막힘이 없이 알아들수 있으니 소통이 원활할 것이고 상호간의 거리감도 쉽게 좁혀질수 있으니말이다. </h3><h3> 말씨란 고정불변 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의 '촌티'를 벗고 세련된 언어로 변신한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수 있지 않는가.</h3><h3> 진정(真正) 호감형의 말씨, 뭐니뭐니 해도 진정(真情)이 최우선이 아닌가 한다.</h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