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

云龙

<h3>수필</h3><h3> 나의 살던 고향은 ...</h3><h3> </h3><h3> 문운룡 </h3><h3> 우리는 "나의 살던 고향은" 하면 의례 꽃피는 산골이 떠오를 것이다.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불러봤을 그 유명한 동요 '고향의 봄'의 가사인 원인도 있겠지만 삼천리 금수강산이 우리 모두의 '고향'이고 보면 자연스런 련상일 수도 있겠다.</h3><h3> 하지만 내가 나서 자란 곳은 이처럼 그림같은 동네가 아니였다. 한동에 대여섯집씩 거주하는 단층 벽돌집 몇동이 들어앉은 조선족과 한족이 거의 반반씩 이룬 '구정부 뒤동네', 식수(食水)는 수십세대가 마을 한 복판에 설치한 수도꼭지에 의거해야 했고 대소변도 역시 마을에 하나뿐인 공용변소를 리용해야 했던, 어쩌면 지금 가끔 티비에서나 볼수 있는 피난시설과 흡사한 생활공간... 나의 고향동네는 이처럼 노래에서 나오는 '울긋불긋 꽃대궐'과는 거리가 먼 도회지의 한 주거단지였다. 하지만 이런 '피난시설'이 어느 시점부터인가 내 가슴속 '메카'로 자리잡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런 감수가 커짐은 무엇때문일가?</h3><h3> 3년전 옛동네 사람들이 옛정을 주고받으며 찌든 일상을 위로받기 위해 만든 위챗방에 최근 떠오른 사진 한장이 오래도록 나의 흉벽을 울렸다. 다들 세상을 뜨거나 병환에 있는 와중에 옛동네 어르신들가운데 아직 상대적으로 거동이 자유스럽고 의식이 분명한 80대 후반의 두 안로인이 합영한 사진인데 한 로인이 동지날을 계기로 팥죽을 보따리에 싸들고 걸어서 30분거리의 다른 한 로인댁을 방문한 것이였다! 이 사진속의 화면, 아니 이 사진이 내포한 이야기에 어쩌면 요즘 내가 찾고있는 답이 숨어있지 않을가? 어제날의 '피난시설'이 오늘날 내 마음속 '성지(圣地)'로 부각되는 원인 말이다.</h3><h3> 아침이면 공용변소 앞에 사람들이 줄지어 섰고 저녁이면 수도물 받기 위한 물통들이 장사진을 이루던 것이 당시 동네의 특이한 풍경이였다. 가끔은 순번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시비가 붙는 일도 종종 있었으나 지금은 그마저도 마을의 생기 넘치는 활력으로, 그리운 추억으로 간직되고있다. 여름이면 또 집집마다 문앞 간이화로에 불을 지펴 때시걱을 끓였는데 그러다보니 온동네의 '식단'이 오픈되다 싶이 했다. 하긴 고기 한근도 사먹기 어렵던 시절이라 식단이라야 거의 모두가 남새류 찌개나 볶음에 강냉이가루떡이였다. 속에 기름기를 보충할 쯤이면 이웃간에 합의를 봐서 그날에는 같이 고기붙이를 사다가 함께 '생활개선'을 했고 그런 날은 동네 아이들에게는 바로 '명절'이였다. 고기 익는 냄새가 진동하는 동네를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발구름소리는 하늘을 찌를듯 했다.</h3><h3> '생활개선'뿐이 아니였다. 그때는 동네에서 웬간한 대소사들이 통일적으로 이루어졌다. 동네에 리발사가 나타나서 어느 집 애가 머리를 깎았다면 그날은 온 동네 애들이 그 리발사의 가위손에 빠져나갈수 없었고 어떤 애가 어느 날 색다른 고무신을 신었다면 이틑날로 똑같은 양식으로 동네애들의 신발이 통일된다. 식량이 딸리던 세월이라 분한을 늘리기 위해 그때 조선족집들에서는 얼마 안되는 배급밀가루를 주변의 한족농민들과 입쌀로 교환해 먹군 했는데 그런 '교역'활동에도 여러 집이 왕왕이 같이 움직였다. 그때는 동네 한집의 대사가 곧 동네 전체의 대사였다. 어른들의 생일축하, 초겨울의 김치행사, 병문안 등등 그때는 동네에 모임도 많았고 서로간에 들락날락 친척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다. </h3><h3> 그때의 동네가 외곽적으로는 지금의 시각으로 피난시설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당시 동년인 우리들에게는 신나는 '놀이동산'이요, 꿈의 '요람'이였다. 딱지치기, 유리구슬까기, 제기차기, 통차기, 전투놀이, 술래잡기 등 그때는 놀이도 많았고 지금처럼 공부에는 별로 긴 시간을 들인것 같지를 않다. 부모님들도 지금처럼 공부를 하라고 극성을 부린것 같지를 않다. 그래도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여 첫 3년간 우리 동네 10여세대 조선족들에서 8-9명의 대학생과 중등전문학교 학생을 배출하여 같은 동네 한족들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쩌빵 꼬리 쩐 리하이!(这帮高丽真厉害!)" </h3><h3> 가끔은 옛 동네 - '나의 살던 고향'을 찾아보군 한다. 엄밀히 따지면 옛 동네 터 라고 해야 함이 준확할듯 하다. 지금은 그 자리에 고층아빠트가 일어섰고 원 '고향주민'들은 모두 타지역으로 떠나버렸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저희들끼리도 서로 모르는채 살고있다. 옛 동네 터를 둘러보며 건물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데 우리의 소중한 것들이 땅속으로 스며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우리의 숨결, 우리의 인정, 우리의 추억이 소실된다는 느낌이였다. 그러고 보면 옛날 살던 곳이 '꽃피는 동산'이고 호화스로운 고급아빠트 단지라고 해서 고향이 그리워지는 것이 아닌듯 하다. 우리가 "고향, 고향..." 하고 꿈결에도 외우는 것은 바로 그제날 한식구마냥 정을 쌓으며 함께 울고 웃었던 고향사람들 때문일 것이다.</h3><h3> 요즘 우리가 살고있는 주거시설은 편리하기 그지없다. 실내에 상하수도는 물론 현대화 화잘실이 기본으로 갖추어졌고 가스렌지에 전기밥솥에... 손가락만 까딱 하면 모든 것이 쉽게 해결된다. 지금은 방도 한사람이 한칸씩, 좀 비좁다고 해야 둘이 하나를 쓴다. 옛 동네에서 우리는 15-16평방메터도 안되는 단칸방에서 5-6명 지어 7-8명의 식구들이 한데 뒹굴며 먹고 자고 했다. 그런 렬악한 환경속에서도 우리 부모님들이 어떻게 그 많은 자식들을 낳아 키웠을가 가끔 궁리를 해보는데 지금도 풀수 없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그래도 그때 동네는 하냥 생기로 들끓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밝은 웃음이 넘실대였다. 원망과 초조, 불안과는 거리가 멀었다. </h3><h3>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속이 허전하고 마음이 힘겹고 늘 초조하고 불안하다. 나는 지금 사는 아빠트 바로 이웃집 하고는 어느 정도 인사도 하며 지내지만 아래웃충과는 수년이 지나도록 안면도 트지 못한 상황이다. 혹시 급한 일이 생길지라도 련락할 방법조차 모른다. 남들하고는 그렇다 치더라도 형제자매, 일가친척 들과도 명절에야 겨우 만나는 실정이다. 또 요즘의 애들은 자기 방에 한번 들어갔다 하면 두문불출하며 부모와도 대화 한번 하기 힘들다. 그들한테 먼 후날 '고향'에 대한 향수나 추억이 있을지, 성장과정에 이처럼 '고향체험'을 생략하고서도 정서적으로 건전할수 있을지 가끔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만 차라리 이것이 한낱 소견 짧은 몰지각인의 우(忧)였으면 하고 바랄뿐이다. </h3><h3> 거의 구십을 바라보는 고령임에도 팥죽꾸레미를 안고 걸어서 옛 이웃을 찾아간 로인, 찾아온 옛동네 친구를 구김살 없는 웃음으로 환대하는 다른 한 로인, 요즘의 인정세태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 아닐수 없다. 풍요로운 요즘 세월에 팥죽이 뭐가 대수랴만은 두 로인이 보여준 수십년간의 훈훈한 우정, 이를 밑바탕으로 하여 쌓은 마음의 넉넉함이야말로 진정한 풍요로움이 아닌가 한다.</h3><h3>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나의 살던 고향'이 오늘도 래일도 오래도록 살아 숨쉬였으면 하는 바람이다.</h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