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3> 포화의 나날 우리의 청춘 빛내여갔네 </h3><div><br></div><div>- 해방전쟁과 조선전쟁 참전용사 서명국 방춘명 부부를 만나</div><div><br></div><div> 문운룡기자</div><div><br></div><div> 금년은 심양해방 60주년과 조선전쟁 정전체결 55돐이 되는 해이다. 이와같은 뜻깊은 나날을 맞으며 기자는 일전 해방전쟁과 조선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공화국창건과 보가위국의 성스러운 위업을 위해 자신들의 청춘을 바쳐 싸워온 서명국(79), 방춘명(78) 로전사부부를 방문했다. </div><div> 이들 로전사부부는 심양시 소가툰구 정부청사 뒤켠에 위치한 한 평범한 아빠트에 거주, 기자가 찾아간다는 전갈을 받고 방춘명로인은 문밖까지 나와 영접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방로인은 우리 료녕일대 조선족집거구에서 흔히 볼수 있는 전형적인 평안도할머니 형상으로 토배기평안도 사투리가 그처럼 구수하고 정다울수가 없었다.</div><div> “가끔 글쓰는 사람들이 찾아오디, 근데 뭘 말하거가 있어야디.”</div><div> 집안 영접실에 들어서니 서명국로인은 창문턱에 쪼그리고 올라앉아 한창 조롱안의 새와 장난을 걸고있었다. 한때 토비숙청의 치렬한 전투장에서 용맹을 떨쳤던 위용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오히려 개구쟁이 소년을 방불케하는 모습에 기자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div><div> “그때 국민당군대가 와 그케 못되게 굴었는지. 백성들 부역에 내몰고 부녀 겁탈하고 집짐승 빼앗아먹고...”</div><div> 그래서 백성들은 국민당을 저주하고 공산당을 옹호하며 용약 해방군에 입대, 신빈현 영릉진에 살던 방춘명로인도 유격대가 마을에 들어와 군대를 모집하자 사촌녀동생과 다른 한 친구 셋이서 등록하게 됐다. 어머니는 계집애가 무슨 군대냐며 반대했으나 아버지는 “남들은 아들들이 둘셋씩이나 참군하는데 우리 집은 3자매뿐이니 그럼 둘째인 네가 아들구실을 하거라”며 동의를 했다. 그때가 1948년 2월로서 방로인이 방금 17살에 잡히던 해였다.</div><div> 20일간의 강훈련을 거친후 방로인 등은 위생병으로 배치되여 남하하는 부대를 따라 밤낮없이 행군하고 전투하는 나날을 거듭하게 되였다. 하루 40-50리 걷는 것은 보통이였고 100리 넘게 걷는 경우도 태반사였다. 제4야전군 42병퇀 소속인 방로인은 부대의 이동과 함께 남으로 남으로 진격하며 수많은 부상자 치료에 참여, 장강을 넘는 그 유명한 도강전역에도 자신의 자욱을 남겼다. </div><div> 해방전쟁이 끝나서 얼마 안되여 조선전쟁이 터지자 방로인 등 국내 조선족군인 500여명은 상급의 지시에 따라 첫패로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인민군에 편성, 보다 가렬하고 처절한 전장에 림하게 됐다. 조선인민군 모부 특무장이 된 방로인은 부대와 함께 서울을 거쳐 락동강을 지나 부산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한 산마루에까지 이르게 됐는데 난데없는 즉각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후에 안 일이지만 미군이 인천을 상륙하며 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했던 것이다. 부대가 뿔뿔히 흩어지며 방로인 등 3남2녀가 한동아리로 행동하게 됐다. 그들은 큰길로는 내려올수 없고 산발을 타고 퇴각, 하루 3-5개의 산등성이를 넘으며 말로는 형용키 어려운 나날들을 이어갔다. 배낭의 식량은 언녕 거덜나 도토리를 줏어먹으며 허기를 달랬고 옷은 여기저기 헤여지고 찢어져 살이 드러나 쓰리고 아팠다. 한번은 너무도 배가 고파 큰 모험을 무릅쓰고 산아래 한 농가에 들려 보리밥을 과식한 탓에 소화가 안되고 배가 불어 모진 진통을 겪기도 했다. 락동강에 와서는 하늘이 도왔는지 고무배 한척을 만나 기적적으로 고비를 넘게 되였다. </div><div> “우리가 방금 강을 건넜는데 강 저쪽에서 미군들이 추격해오더누만... 지금 생각해도 그때 정말 천명이였지.”</div><div> 이들은 이렇게 간난신고끝에 28일만에 3.8선을 넘을수 있었고 지원군 기병부대를 만나 그들의 도움으로 금강산지역에 자리잡고있는 원 부대와 합류하게 되였다. 그때 그 심정은 오래동안 생리별했다가 만나는 부모와의 상봉보다도 더 감격적이고 희열에 벅찼다고 했다. </div><div> 우리의 대화에 별 관심 없는듯 그때까지 한마디 참견 없이 묵묵히 있던 서명국로인이 입을 열었다.</div><div> “저 마누란 약가방이나 메고 흔들댔지만 나야 진짜 총을 메고 싸웠지...그러니 저 로친은 가짜고 내가 진짜야.”</div><div> 그러니 마누라는 2선에서 부상자들이나 접대했을뿐이고 1선에서 적들과 총부리를 겨누고 싸운 자기가 정통참전용사란 뜻이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으나 평소 마누라와 곧잘 삐둘어진 소리를 잘 한다는 서로인, 오늘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div><div> 서명국로인은 통화시조선족중학시절인 1946년 16살 어린 나이에 동북민주련군 리홍광지대에 입대했다. 항일부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지구에서 생활하며 어려서부터 많은 진보적영향을 받아온 그는 부대가 학교에서 대원을 모집하자 졸업학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뜻 신청을 했다. 그는 부대 군정대학에서 1년간 학습하고나서 견습소대장을 거쳐 류하현무공대 1지대장이 되였다. 당시 이 지역에는 국민당 잔여세력들과 지방 악패들로 무어진 토비들의 활동이 창궐하였는데 그들은 대포와 기관총 등 중무기까지 갖추고 백성들의 생명재산을 위협했고 아군과 맞섰다. 무공대의 주된 임무는 바로 이들 악당무리를 소탕하는 것이였다. 서로인은 그때 20살도 차지 않은 애숭이였지만 두려움 모르고 대원들의 선두에 서서 지휘관의 슬기와 용맹을 과시했다.</div><div> 해방전쟁 결속후 조선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1951년부터 1954년까지 3년간 중국인민지원군 조중정전대표단 통역관의 중임을 맡았다. 당시 국내에서 4명의 조선족이 통역관으로 선출, 서로인은 그중의 한사람이였다.</div><div> 귀국후에는 또 무순전범관리소에서 한동안 통역일을 했다. “만융촌소학교 교장으로 방금 발령이 났는데 상급에서 또 무순으로 가보라고 하기에 그곳에 가서 2년간 도왔지.” 로인은 3년전 뇌경색으로 쓰러진적 있어 발음이 좀 어눌했지만 사유만은 뚜렷했고 기억력도 비상했다.</div><div> 로인은 그후 많은 시간을 교육사업에 종사, 오가황과 만융촌에서 교장직을 맡고 민족의 기초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div><div> 하지만 그동안 그의 헌신적인 삶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을줄이야! 당과 국가의 사업이 보다 잘되게 하려는 념원에서 바른말 몇마디 했다고 “우파분자”란 모자를 쓰고 농촌 이곳저곳을 다니며 “로동개조”를 해야 했고 그후 휘몰아친 동란년대에는 “잡귀신”으로 몰려 비인간적인 대접에 시달려야 했다. 공화국 창건과 나라 건설을 위해 온몸 다바친 충신이 졸지에 “역적”이 된셈이다. </div><div> 후에 시국이 바로잡혀 그에게 들씌워졌던 온갖 터무니없는 모자는 벗겨졌지만 잃어버린 인생의 황금같은 20년은 되돌릴수 없었다. 로인은 정책락실후 소가툰구조선족중심소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퇴직했다.</div><div> “하긴 나도 그렇고 마누라도 그렇고 애당초 뭘 바라고 어린 나이에 혁명에 투신한 것은 아니였지. 그저 반동세력 물리치고 보다 잘사는 세상 만들어보자는 순수한 마음이였어. 지금 나라가 하루달리 부강해지니 그것으로 우린 만족이야.”</div><div> 친척의 소개로 둘이 만나 결혼하게 된 이들 부부는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는데 하나같이 효심이 깊고 손자손녀들 또한 여러가지로 할아버지,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려 로부부는 만년에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이들은 자주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와 전쟁년대의 이야기를 청해 들으며 말동무를 해드리기도 하고 집안의 파손된 기물을 척척 수리해놓는 솜씨를 보이기도 한다. 작년 이 집의 막내 외손자가 청화대학 입학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두 로인께 선사하기도 했다. (2008년 여름)</div><div>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