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3><언어>편(옥타비오 파스, 김홍근・김은중 옮김, 활과 리라 , 1998.) <h3></h3><h3></h3><h3></h3><h3>1. 언어에 대한 인간의 태도 </h3><h3></h3><h3></h3><h3>언어를 대하는 인간의 맨 처음 태도는 기호와 표상된 대상이 동일하다는 신뢰였다.(35쪽) </h3><h3></h3><h3></h3><h3>갑자기 단어의 효능에 대한 믿음이 상시되자, 시인(아르튀르 랭보)은 “난 내 무릎 위에 상처난 아름다움을 길게 뉘었다. 그리고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말일까?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말없이 포착될 수 없기 때문이다.(36쪽) </h3><h3></h3><h3></h3><h3>모든 철학의 모호성은 철학이 언어에 치명적으로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36쪽) </h3><h3></h3><h3></h3><h3>말은 인간 자신이다.(37쪽) </h3><h3></h3><h3></h3><h3>인간이 미지의 실재에 부딪혔을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 즉 세례하는 일이다.(37쪽) </h3><h3></h3><h3></h3><h3></h3><h3>2. 인간의 언어가 동물의 것과 다른 점 </h3><h3></h3><h3></h3><h3>(1) 인간의 일상어가 비할 데 없이 복합적이다. </h3><h3></h3><h3></h3><h3>(2) 동물의 언어에는 추상적 사유가 부재하다. </h3><h3></h3><h3></h3><h3>(3) 마샬 어번이 설명하는 말의 세 가지 기능(39쪽) </h3><h3></h3><h3></h3><h3>-말은 무엇인가를 가리키거나 혹은 지시하는 이름이다. </h3><h3></h3><h3></h3><h3>-말은 감탄사와 의성어의 경우처럼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자극에 본능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h3><h3></h3><h3></h3><h3>-말은 표상으로서의 기호이며 상징이기도 하다. </h3><h3></h3><h3></h3><h3>동물들의 어떤 외침에는 지시를 나타내는 미약한 징후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상징적이거나 혹은 표상적 기능이 있다고는 증명되지 않았다.(40쪽) </h3><h3></h3><h3></h3><h3></h3><h3>3. 언어의 발생과 전개 </h3><h3></h3><h3></h3><h3>언어의 발생과 전개를, 단순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으로 점차적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으로, 예를 들어, 감탄사, 외침 혹은 의성어로부터 지시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가설들 역시 근거가 없는 것 같다. 원시 언어들도 대단한 복잡성을 과시한다.(40~41쪽) </h3><h3></h3><h3></h3><h3>일상 언어의 기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전문가들은 “모든 말들과 언어의 형태들이 일차적으로 신화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하는 듯싶다 .(41쪽) </h3><h3></h3><h3></h3><h3>“시초부터 언어와 신화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 언어와 신화의 기본적인 특성은 상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모든 상징적 기능의 내부에 있는 철저한 은유적 원리에 충실하다는 것이다.”(42쪽) </h3><h3></h3><h3></h3><h3></h3><h3>4. 인간과 언어 </h3><h3></h3><h3></h3><h3>인간은 말 덕분에, 즉 인간을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고 자연의 세계에서 분리시켜주는 원초적 은유 덕분에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창조할 때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은유가 된다 .(42쪽) </h3><h3></h3><h3></h3><h3></h3><h3>5. 언어와 시 </h3><h3></h3><h3></h3><h3>언어는 자발적으로 은유로 구체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h3><h3></h3><h3></h3><h3>일상어는 시를 이루는 물질 혹은 자양분이지만 시는 아니다. 시와 시적 표현들—어제 발명되었거나 혹은 전통적 지혜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민중들이 오래 전부터 반복해온—의 차이점은, 시는 언어를 초월하려는 시도라는 점이다 .(43쪽) </h3><h3></h3><h3></h3><h3>말과 사물, 이름과 이름 붙여진 것 사이의 융합—혹은 결합이라는 표현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은 그보다 먼저 인간이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계와 화해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시는 계속해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 심원하고 원초적인 것을 만나러 가기 위한 많지 않은 방법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45쪽) </h3><h3></h3><h3></h3><h3></h3><h3>6. 시적 창조와 언어 </h3><h3></h3><h3></h3><h3>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47쪽) </h3><h3></h3><h3></h3><h3>시는 독창적이며 유일한 것이지만 독서와 음송을 통한 소통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를 창조하고 민중들은 음송을 통하여 시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시인과 독자는 동일한 실재의 두 순간일 뿐이다. 순환적이라고 말해도 그다지 틀리지 않는 방법으로, 시인과 독자는 번갈아가면서 시라는 불꽃을 일으킨다 .(47~48쪽) </h3><h3></h3><h3></h3><h3>유머는 시가 사용하는 주된 무기 중의 하나이다.(49쪽) </h3><h3></h3><h3></h3><h3></h3><h3>7. 현대사회와 시 </h3><h3></h3><h3></h3><h3>시인이 처한 사회적 상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근대의 특징은 시인이 주변부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근대사회에서 시는 부르주아 계급이 소화할 수 없는 양식이다. 계속해서 시를 길들이려고 시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일군의 시인들이나 어느 시 운동이 이러한 시도에 굴복하여 사회적 질서에 복귀하자마자, 새로운 비판과 물의를 야기하는 또 다른 창조가 솟아나게 마련인데, 이것은 때로는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49쪽) </h3><h3></h3><h3></h3><h3>시는 존재의 가장 심층에 거주한다. 시는 공동체의 생생한 언어, 신화, 꿈 그리고 열정들, 다시 말해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성향들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50쪽) </h3><h3></h3><h3></h3><h3>근대의 정치적 당파들은 시인을 전도사로 만들어 타락시킨다.(51쪽) </h3><h3></h3><h3></h3><h3>우리 시대의 시는 사회와 인간 자신의 변화를 통하지 않고는 고독과 반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대 시인의 행위는 단지 개인과 소집단에만 행사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한계성이 역으로 이 시대에 현대시가 가질 수 있는 유효성과 미래에 풍요롭게 꽃필 수 있는 토대가 된다.(53쪽) </h3><h3></h3><h3></h3><h3>한 사회의 피폐가 반드시 예술의 사멸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며 시인의 침묵을 유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즉, 고독한 시인과 작품의 출현을 유발하는 것이다.(55쪽) </h3><h3></h3><h3></h3><h3>시가 만드는 말의 우주는 사전의 단어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단어들로 만들어져 있다. 시인은 죽은 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목소리의 거부(巨富)다. 개인적 언어는 시인에 의해서 드러나거나 혹은 변형된 공통의 언어를 뜻한다. 비의적 시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시인의 사명을 “부족의 말에 가장 순수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57쪽) </h3><h3></h3><h3></h3><h3>시인은 말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말에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무슨 뜻인가?(57쪽) </h3><h3></h3><h3></h3><h3>어디선가 발레리는 “시는 감정적 외침이 발전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발전과 감정적 외침 사이에 모순적 긴장이 존재한다. 내가 여기에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긴장이 곧 시라는 사실이다. 양자 중의 하나가 사라지면, 시는 기계적인 감탄사로 복귀하거나 혹은 장황한 부연, 묘사 혹은 정리로 변한다.(58쪽) </h3><h3></h3><h3></h3><h3>시는 감정적 외침이 말하지 못한 것을 듣는 귀이다.(58쪽) </h3><h3></h3><h3></h3><h3>시 덕분에 언어는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 먼저, 일반적으로 사유에 의해서 손상된 조형적이고 음성적인 가치를 회복하게 되며, 이어서 정감적인 가치를, 마지막으로 의미를 나타내는 가치를 회복한다. 언어를 순화하는 것은 시인의 과제이며, 이것은 언어에게 원래의 본성을 되돌려주는 것을 뜻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말은 본래 다의적이다. 만일 시를 통하여 말이 자신의 본성, 다시 말해 동시에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사물을 의미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회복한다면, 시는 언어의 본질 자체인 의미화 작용 혹은 의미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는 쓸모없으며 동시에 기괴한 작업—인간에게서 가장 소중한 자산인 언어를 박탈하고 그 대가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의 울림을 되돌려주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시의 말들과 구문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60쪽) </h3><h3></h3><h3><br></h3></h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