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3>시와 세기말 / 옥타비오 파스 </h3><h3></h3><h3></h3><h3>1. 소수와 다수 </h3><h3></h3><h3>‘시를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누가 시를 읽는가?’라는 비슷한 질문에 스페인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는 자신의 어느 시집에서 “거대한 소수에게 바침”이라는 헌사로 대답했다. ‘소수’라는 명사는 독자의 수를 스탕달의“행복한 소수”로 환원하지만, ‘거대한’이라는 형용사는 ‘소수’라는 명사를 별안간 ‘소수가 곧 다수’라는 뜻으로 확장시킨다. 히메네스는 헤아릴 수 있는 다수라는 상대적 개념에 반하여 비교 불가능한 소수라는 절대적 개념을 내세웠다. </h3><h3>시를 읽는 독자는, 아무리 그 수가 늘어나도 사회적으로 한상 소수에 속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거대한 무엇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소수이면서 다수인 시의 독자는 불가공약적인 현실로 들어가고, 그 언어의 거울 속에서 자기 자신의 무한성을 발견한다. 시를 읽는 것은 독자를 초개인적인 공간, 즉 말 그대로 거대한 공간과 접속시키는 것이다. </h3><h3>예술은 기술과 사회적 여건이 어떠하든지 간에 지속될 것이다. 사회적 쟁점들과 영웅들은 간 곳 없지만, 시와 그림과 교향곡은 의구하다. 물론 과학과 철학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예술이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소수의 작업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소수인가 다수인가 하는 수치상의 문제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의미를 가지려면 두 가지 문제가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공간적인 분리로서 대중과 관람자의 다양성의 문제다. 둘째는 시간적인 지속성으로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독자와 청중의 연속성이다. 다양성과 지속성모두 단순한 숫자상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h3><h3></h3><h3>현대인은 늘 주의가 산만한 상태로 살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의 일상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비밀스럽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상의 나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산만함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하찮고 무분별한 소란스러움에 매몰되어 자기 자신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의 산만함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돌아가는 올바른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독서는 정찰이다. 광고와 의미 없는 의사소통이 난무하는 시대에 몇 사람이나 그런 독서를 할 수 있을까?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통계상의 수치가 아니라, 그 소수의 독자들에게 우리의 문명의 지속성이 달려 있다. </h3><h3></h3><h3>근대가 시작될 때부터 시는 근대성과 이중의 관계를 맺어왔다. 시와 근대성 사이의 갈등은 19 세기 말에 두드러졌고, 20세기 초반 전위주의에 이르러 갈등은 불화로 변했다. 시는 정통족인 도덕적, 미학적 가치를 무시했고 종종 비웃기까지 했다. 시는 언어의 지반을 붕괴 시켰고 기화와 그 의미를 변형시켰다. 또한 시는 매혹적인 언어의 과물이 거주하는 세계를 건설하기도 했고, 의식을 빨아들이는 투명한 누속임의 연못을 만들기도 했다. 시에 대한 대중적 무관심은 시인들이 매혹되었고 동시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던 근대성을 실현시킨 부르주아 계급이 시에 보인 반응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먼저 낭만주의 시인들에 의해서 그 다음에는 상징주의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 전위주의자들에 의해서 불신되고 무시되었다. 근대 예술에 대한 반감을 정당화하고 부추긴 것은 적의에 찬 강단 비평과 악의적인 무지한 언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화는 파국으로 치달을 만큼 총체적이진ㄴ 않았고, 근대성과 시 사이의 불화는 필연적이었다. </h3><h3></h3><h3>근대시는 그것이 ‘근대적’이기 떼문에,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 시를 읽는 독자들도 동일한 과정으로 인해 자신이 근대인이란 것을 느낀다. 근대성은 탄생과 더불어 스스로와 끊임없이 투쟁해 왔다. 여기에 근대의 이중성이 있고, 지속적인 변화와 변모의 비밀이 숨어 있다. </h3><h3></h3><h3>2.양적기준과 가치 </h3><h3></h3><h3>시는 다른 영역, 특히 에로티시즘, 우정, 쾌락, 신에 대한 경건함과 불운한 이웃에 대한 동정심(프리아모스에 대한 아킬레우스의 감정), 고독, 우울함에서 오는 쓰디쓴 쾌락, 허약한 기억 같은 친밀한 삶의 영역에도 깊숙이 영향을 미쳤다. 시인들은 우리에게 선망, 관능성, 잔인함, 위선, 콤플렉스 같은 인간의 정념을 가르쳐주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이해하도록 가르쳐주었다. </h3><h3>시적 전통은 공간 축과 시간 축이 교차한 결과이다. 공간 축은 끊임없이 상호 의사 소통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지고, 시간 축은 세대를 이어가는 시인과 독자의 연속성으로 이루어진다. 다양한 지역의 독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 의사 소통은 신선한 젊음과 새로운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시적 전통을 풍요롭게 한다. </h3><h3>근대적 출판체제에서는 모든 장소가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조차도, ‘여기’에 있다. 여기는 바로 ‘지금’이다. 공간축은 시간축이 된다. 시장의 작용은 시적 전통을 형성하는 시간 축도 부식시킨다. 지금이 특권을 갖게 됨으로써 우리를 과거와 연결시키는 매듭을 끊어버린다. 18세기부터 서양문명은 미래를 향하고 있다. 이러한 순례를 인도하는 안내자는 진보라는 개념의 북극성이다. 몇 년 전부터 그 별은 빛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현재가 그 영광을 이어 받았다. 그러나 현재는 부동할 뿐 상승하지 못하며, 움직일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무게없는 현재이다.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믿지만 아무데도 가지 못하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현재이다. 목표가 증발함으로써 그 반대급부로 수단이 증가한다. 현대인의 현재는 동쪽도 없고 북쪽도 없는, 그야말로 방향을 상실한 현재다. 문학적 전통 내에서 현재의 확장은 순간적인 의사소통을 지향하는 추세로 나타난다. 이제 완전함의 속성은 지속이라기 보다는 재빠른 소비이다. 과거는 실종되고 미래는 희미하다. 현재 또한 순간을 향하여 날을 세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증발한다. 순간은 폭발음과 함께 사라진다. </h3><h3>시인 한사람 한사람은 전통이라는 강의 한 맥박이며 언어의 한 순간이다. 때때로 시인들이 전통을 부정하는 것은 다른 전통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주기적이며 근대에 들어와 더 두드러진다. 낭만주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운동은 자신의 전통을 만들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시인들의 명단을 작성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패러디였으며 대학의 졸업 시험에 대한 패러디였다. 시인은 자신의 쇠사슬의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즉 어제와 내일을 잇는 다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20세기를 마감하면서 갑자기 그 다리가 두 개의 까마득한 심연-멀어져가는 과거라는 심연과 붕괴되는 미래라는 심연- 사이에 걸쳐져 있음을 발견했다. 시인은 시간 속에 길을 잃었음을 느낀다. </h3><h3>시에서 본질적인 것은 시적 형식인데, 형식은 죽음과 세월의 마모에 저항하는 인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형식은 지속을 위한 것이다. 형식은 때로는 도전이며, 때로는 요새이고, 또 때로는 기념비 이지만, 언제나 오래도록 지속하려는 의지이다. 새롭게 응축되고 변형된 시간은 현실적 시간에 맞서 불변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숨쉬는 건축물이 되고자 한다. </h3> <h3>3. 균형과 예측 </h3><h3></h3><h3>시 운동의 부재는 우리 시대가 경험하고 있는 커다란 변화 중의 하나를 반연하고 있는데, 그것은 단절의 전통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성이 끝나고 있거나 혹은 달라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 중의 하나다. 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다른 시대가 시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시대는 근대의 변형인가? 새로운 시작이건 근대의 변형이건 간에 세기말의 표식은 모든 것에 의문 부호를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불확실성의 시대도 시적이고 예술적인 창조에서는 늘 풍성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시의 건강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상황이다. </h3><h3>서로 다른 가치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에 수익의 기준이 도입됨으로써 예술을 타락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적 생산을 자극한다. 어쨌든 시는 지하에서 숨죽이고 있어야 했지만 살아남았다. 또한 시에 대한 긍정적인 표시들을 보면, 분산되어 있지만 광업위한 독자들이 있고 그 수는 매년 늘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시인들이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들이 가졌던 사회적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지만 중남미와 다른 곳에서는 시인이 여전히 대중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와 중국, 중앙유럽의 모든 나라에서는 시인들이 공산주의 관료제도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투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왔다. </h3><h3>부정과 긍정, 단절과 유대의 이중적인 운동은 모든 문학의 역사에서 늘 일어나는 현상이며 특히 근대문학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다. 오늘날의 문학에서 이러한 이중적인 운동이 보이지 않은 것이 불안한 징조이다. 근대에서 소우의 행동은 문학적 전통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 역할을 해왔다. 잡지와 작은 출판사 같은 소수집단의 활동이 가설적인 전원 합의를 위해서 사라진다는 것은 문학이라는 생명체를 불구로 만들고 혹은 죽일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의 몬든 영역에서 불안감이 지배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현대문학에 무엇인가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것은 ‘아니다NO’라는 말이 아니며, ‘아니다’는 그 다음에 올 대긍정을 예비하는 알람이다. </h3><h3>시가 노래하는 것은 지금 지나쳐가는 것들이다. 시의 기능은 일상의 삶에 형태를 부여하고 가시화화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의 가장 오래되고 변하지 않는 보편적 임무라는 것이다. 모든 민족이 신곡이나 실낙원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역사와 혼재되어 있는 시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서 사랑이나 결투, 고독이나 집단적 환희를 표현하는 노래와 로망스가 만들어졌다. </h3><h3></h3><h3>*보들레르의「젊은 시인들에게 주는 충고」의 몇 구절을 보면 “나는 열심히 시를 쓰는 재능있는 젊은 시인들에게 결코 시를 포기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시는 결실이 풍요로운 예술이다. 시는 고양된 결실을 거두기 위한 일종의 투자지만 수확을 거두는 일은 매우 더디다.” </h3><h3></h3><h3>근대 과학 기술과 시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대립을 제시해보면, 첫 번째 대립은 세계의 이미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실천에 관한 것, 즉 세계를 바꾸려는 행동, 어떤 면에서는 세계를 추방시키려는 행동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 대립은 언제나 세계의 비전에 관한 것이다. 시가 이미 새로운 의사소통의 방법들을 더욱 과감하고 창조적으로 사용하도록 시인들에게 말한다. 대중 앞에서 시를 읽는 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는 시의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첫째 카세트의 보급률이 늘어나면서 시청률의 횡포에서 벗어나 대중을 향한 길이 열리고 있다. 둘째 텔레비전의 화면에는 커다란 두 갈래의 시 전통, 즉 구어체의 전통과 문어체의 전통이 합류된다. 이런 방업은 책과 인쇄술만큼이나 심원한 방법으로 시의 발표와 수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시각과 청각, 이미지와 말이라는 인간이 갖는 두 가지의 특권적인 감각 사이에 결합이 이우러질 것이다. 그리고 멀지 않은 미래에 미학적 쾌락과 시적 경험, 즉 축제와 관조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축제는 참여와 교감의 예술이며, 관조는 우주와 나누는 침묵의 대화이다.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진 미래의 시에서는 두 가지의 경험이 결합될 것이다. 축제와 관조: 화면이라는 살아 있는 페이지 위에 색깔과 움직임을 갖는 기호들, 선들, 이미지들이 솟아올라 인쇄될 것이다. 목소리들은 울림과 반향의 기호학, 소리와 의미가 결합된 공기의 천을 수놓을 것이다. </h3><h3></h3><h3>4. 타자의 목소리 </h3><h3></h3><h3>혁명과 종교 사이에서 시는 다른 목소리였다. 그 소리가 다른 이유는 그것이 정열과 계시의 소리이고, 과거의 것이면서 오늘 지금의 소리이며 동시에 시간이 존재하기 이전의 태초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시는 이단적이고 이교도적이며, 순수하면서 퇴폐적이고, 깨끗하면서도 진흙투성이이고, 하늘에 떠 있으면서 땅속에 숨어있고, 고요한 암자의 것이면서 동시에 거리 한 모퉁이의 카페의 것이고,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저 멀리 비껴 있는 존재다. 그 시간이 길거나 짧거나, 반복적이건 일회적이건 간에 그들이 진정으로 시인이 되는 그 순간에 모든 시인들은 다른 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타인의 것이고, 누구의 것이 아니면서 모두의 것이다. 시인을 다른 사람과 구별시켜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자기 자신이면서도 동시에 타인이 되는 그 드문 순간에 그는 시인이 되는 것이다. </h3><h3></h3><h3>근대 시인의 특성은 그의 행동이나 사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음성에서 온다. 차라리 그 음성이 깃들여 있는 어조에서 온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정의 할 수도, 혼동될 수도 없는 어조여서 필연적으로 그 소리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원죄에서가 아니라 근본적인 다름의 표시다. 혁명과 종교 사이에서 갈라지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눈물과 데모크리토스의 웃음사이에서 동요된 우리 시의 반근대적인 근대성은 진정한 위반을 뜻한다. 그러나 그 위반은 거의 항상 무의식적으로 시인이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나타난다. 위반은 앞서 말했듯이 근원적인 차이에서 싹튼다. 그것은 근대에서 시가 부속품이 아니라 시 자체가 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시는 그 주제, 언어, 그리고 형식적인 면에서 근대적일 수 있지만 그 깊은 본성은 반근대적인 음성일 수밖에 없다. 시는 근대성과는 동떨어진 현실, 가장 오래되고 역사의 변화와 무관한 내부적인 심층세계를 표현한다. </h3><h3></h3><h3>시는 비록 그 땅의 현실과 역사에 매여 있으나 실제로 표현되는 각각의 시는 항상 저 너머의 초역사적인 것을 향하여 열려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저 너머의 종교적인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이면에 대한 지각을 뜻하는 것이다. </h3><h3></h3><h3>시는 이미지화한 ‘기억’이고 또 음성으로 변한 이미지다. 다른 목소리는 저 세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각자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인간의 소리다. </h3><h3>시적인 사고가 작용하는 방식은 상상력이며 이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일치하지 않거나 반대되는 세계들을 관계지어주는 능력에 기초한다. 모든 형태의 시와 언어의 모든 형상은 공통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상이한 사물들간에 감추어진 유사성을 찾고 발견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반대적인 것들까지도 서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h3><h3>시의 작용은 언어를 끌어당김과 밀어냄이라는 두 흐름에 의해 흘러가는, 살아있는 우주로 인식한다. 언어 내에서는 천체와 세포 간의, 입자와 인간간의 투쟁과 사랑 그리고 뭉침과 흩어짐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 주제, 형식, 그리고 사상이 어떻든 간에 각각의 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살아 있는 소우주다. </h3><h3></h3><h3>*시는 기술과 시장에 대한 해독제다. 바로 이것이 우리시대와 다가오는 시대에서의 시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h3><h3></h3><h3>시는 특히 상상력이라는 인간의 특수한 능력에서 나왔기 때문에 만일 상상력이 죽거나 썩게 되면 시도 깨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시를 잊어버리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태초의 혼돈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h3><h3></h3><h3></h3><h3>옥타비오 파스 '흙의 자식들' 中 '시의 세기말' <이스끄라 출처> </h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