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랑 26] 현모량처를 실천한 재능있는 모녀시인 / 홍용암

문학과 그림, 음악

<p><br></p><p><b style="color: rgb(237, 35, 8);"> 조선시대 녀류시인들 시와 사랑 26: </b></p><p><br></p><h1><b style="color: rgb(1, 1, 1);"> &nbsp;현모량처를 실천한 재능있는 모녀시인 </b></h1><p><b style="color: rgb(1, 1, 1);"> ㅡ 조선후기 녀성선비 서령수합과 홍원주</b></p><p><b style="color: rgb(1, 1, 1);">&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nbsp;홍용암 (편저)</b></p><p><br></p><p><br></p> <h3><b> </b></h3><h3><b><br></b></h3><h1><b>&nbsp; 시문에 능했던 </b></h1><h1><b> 조선 최초의 녀성수학가</b></h1><h3><b><br></b></h3><h3><b>&nbsp;&nbsp;&nbsp; 상식적으로 조선조의 강고한 녀성규범에도 불구하고 "서령수합"이라는 최고위층 한 녀성, 즉 "국왕의 안사돈"이라는 특수한 신분의 이 녀류시인의 시문이 중국문단으로 반출된 사건이 19세기 전반에 확인된다. </b></h3><h3><b>&nbsp;&nbsp;&nbsp; 서령수합의 시문은 &lt;&lt;풍산세고&gt;&gt;와 &lt;&lt;해거재시초&gt;&gt;에 실려 중국 문인들에게 보내져서 그들의 눈앞에 본격적으로 로출된다. 이 사업을 추진한것은 효심이 지극한 서령수합의 아들들이였다. 그들은 서령수합의 거상기간동안에 이 집안의 문한세가로서의 위세를 현시하는 일련의 편찬사업을 진행하였고 그 결과물들을 적극적으로 중국에 전파한다. 이 출판물들은 녀류시인인 서령수합의 존재를 매우 핵심적으로 부각하고있다. </b></h3><h3><b>&nbsp;&nbsp;&nbsp; 서령수합(徐令壽閤, 1753~1823)은 영조와 정조, 순조때의 녀류시인으로서 때로는 령수각(令壽閣)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이는 그녀의 호이다.</b></h3><h3><b>&nbsp;&nbsp;&nbsp; 서령수합은 본관이 달성(達城)이며 조선중기 대사간과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서형수(徐逈修, 1725~1779)와 그 부인인 미호 김원행(渼湖金元行)의 딸 사이에서 5남매중 외동딸로 태여났다. </b></h3><h3><b>&nbsp;&nbsp;&nbsp; 그녀는 선조의 부마인 달성위 서경주(徐景霌)의 6대손으로서 증조는 이조참판 서종대(徐宗大)이고 조부는 이조참판 서명훈(徐命勳)이다. 외조부 김원행은 대제학 리재(李縡)의 제자이자 노론 4대신의 한사람인 농암(農岩) 김창협(金昌協)의 손자이다. </b></h3><h3><b>&nbsp;&nbsp;&nbsp; 서령수합은 녀자였기때문에 글을 배울수 없어서 남자형제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어깨너머로 스스로 글을 익혔다. 하지만 다른 형제들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학문을 터득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철저하게 녀자들의 규범을 지키면서 조심스레 공부하였다.</b></h3><h3><b>&nbsp;&nbsp;&nbsp; "세 아들이 모두 뛰여나지만, 네가 만약 사내로 태여났다면 더욱 한세상을 풍미했을것이다..."</b></h3><h3><b>&nbsp;&nbsp;&nbsp; 아버지 서형수는 류달리 총명한 딸이 배워주지도 않은 그 어려운 경서를 스스로 좔좔좔 내리읽는것을 보고는 탄식하였다.</b></h3><h3><b>&nbsp;&nbsp;&nbsp; 그녀는 몸이 허약했지만 영민하여 한번 들은것은 절대로 잊지 않았다. 그녀는 어려서 일찍 경서를 완전히 터득하였다. </b></h3><h3><b>&nbsp;&nbsp;&nbsp; 타고난 령수합의 총명과인한 기질을 알아본 외할머니는 손녀의 신기한 재능을 사랑했으나 마냥 격려할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늘 “녀자로서 문장에 뛰여난 이들중에는 명이 짧은 자가 너무 많았느니라!”고 경계해주었다. </b></h3><h3><b>&nbsp;&nbsp;&nbsp; 대대로 내려온 집안의 학풍은 실사구시의 실학을 추구했으며 돌, 물, 불, 별, 달, 해, 초목, 금수 같은 사물을 탐구하는 명물학(名物學)에 특장을 보이였다. </b></h3><h3><b>&nbsp;&nbsp;&nbsp; 령수합은 글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특히 수학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있었다. 하지만 녀자의 부덕을 지켜 조금도 글을 읽은 티를 내지 않았다. </b></h3><h3><b>&nbsp;&nbsp;&nbsp; 령수합은 1766년(영조 42) 14세에 홍인모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남편은 선조의 사위인 홍주원(洪柱元)의 7대손으로서 명문집안의 자제였다. 증조 홍석보(洪錫輔)는 이조참판을 지냈고 조부 홍상한(洪象漢)은 예조판서를 지냈다. 홍인모는 영의정 홍락성(洪樂性)의 둘째아들로 태여났다가 삼촌 영의정 홍락최(洪樂最)의 양자가 되였다.</b></h3><h3><b>&nbsp;&nbsp;&nbsp; 서령수합은 탁월한 녀류시인이면서도 수학자였던것으로 전해진다. </b></h3><h3><b>&nbsp;&nbsp;&nbsp; “왜 이처럼 번거롭고 리해하기 어렵게 설명했을가...???!” </b></h3><h3><b>&nbsp;&nbsp;&nbsp; 서령수합은 수학원리와 계산방법을 아이들도 쉽게 배울수 있게 설명한 &lt;&lt;주학계몽(籌學啓蒙)&gt;&gt;을 보다가 오히려 저도 모르게 이런 의문이 생겨났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따로 법칙을 만들어 그 문제들을 풀어보았다. </b></h3><h3><b>&nbsp;&nbsp;&nbsp; 서령수합은 수학적 직관과 사고력을 지닌 녀성이였다. 그녀는 조선판 수학의 정석인 &lt;&lt;산학계몽(算學啓蒙)&gt;&gt;을 보다가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공식을 간편히 푸는 방식을 직접 창안해내였다. 그녀의 노력덕분에 일반사람들은 평분(平分), 약분(約分), 정부(正負, 양수와 음수), 구고(句股, 직각삼각형), 개평방(開平方, 제곱근풀이)방정식, 삼각형 등의 수학문제를 손쉽게 풀수 있었다.</b></h3><h3><b>&nbsp;&nbsp;&nbsp; 나중에야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녀가 새롭게 고안한 수학원리와 계산방법은 후에 중국 청대에서 편찬된 수학서 &lt;&lt;수리정온(數理精蘊)&gt;&gt;의 선진적인 풀이법과 완전히 일치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조선 최초의 녀성수학자라 할수 있다. </b></h3><h3><b> 동시에 그녀는 조선후기의 수학 및 기하학 분야에서도 꼭 기억되여야 할 인물이다.</b></h3><h3><b>&nbsp;&nbsp;&nbsp; 그녀는 홍인모와 혼인한 뒤에도 책을 읽는것을 매우 좋아했으나 될수록 부녀자의 "본분"을 지켜 자기가 책을 읽는 모습을 웬간해선 타인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하였다. 령수합이 살던 그 시대는 녀성에게 글을 권한 시절이 아니였기때문이다. </b></h3><h3><b>&nbsp;&nbsp;&nbsp;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바느질도 못할 정도로 몸져누워있을 때 아이들이 가져다준 책들을 혼자&nbsp; 즐겁게 읽고 시름을 잊을만큼 몰래 책을 사랑하기도 하였다. 녀성의 "본분"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책읽기를 포기하지 않은 그러한 자세였다. </b></h3><div><h3><b></b></h3></div> <h3><br></h3><h1><b> 조선후기 </b><b>최고가문 </b><b>대명사인</b><b> </b></h1><h1><b>. </b><b>"</b><b>풍홍달서</b><span style="font-size: 17px;"><b>(豊洪達徐)</b></span><b>"</b></h1><h1><b></b></h1><h3><b></b></h3><h3><b><br></b></h3><h3><b> 서령수합은 무엇보다 우선 녀자로서의 직분을 지키기에 조금도 홀시하거나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들을 낳은 뒤에는 그 양육에 각별히 온갖 지극정성을 쏟았다. 아들이 잘못하면 그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매를 들기도 했고 울음을 터트리면 무릎에 앉혀놓고 계속 훈육하면서 글을 가르쳤다. 학문이 뛰여난데다 겸손한 인품까지 갖추고있으면 금상첨화일것이다. 부덕과 학문을 겸비한다면 남녀신분제도가 엄격한 조선시대에도 녀사로 대접을 받았다. 게다가 자식들까지 훌륭하게 키워내면 현모량처로 더욱 큰 존경을 받는다. 남편 홍인모도 그녀가 학문이 높다는것을 알고는 집안에서 책을 읽고 글을 짓도록 적극 권유하였으나 령수갑은 부덕(妇德)을 지켜야 한다는 그 당시의 전통관념때문에 여전히 사람들앞에 잘 나서지를 않았다. 서령수합의 문학적 재능 역시 남달랐다. 그러나 그녀가 최초로 시를 짓기 시작한 때는 결혼한후 평소에 시짓기를 좋아했던 남편이 자신의 시에 화답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령수합에게 시작(詩作)할것을 요구했기때문이다. 그녀는 홍인모가 참고로 하라고 건네준 당률시(唐律詩) 한권을 독파한지 열흘도 못되여 출중한 률시를 창작하였고 장편경운(硬韻)을 지었을 정도로 뛰여난 시적 재능을 크게 드러냈다. 홍인모가 령수합의 신기한 재질을 알아보고 독서와 시작활동을 하도록 하도 배려해주자 친밀한 지우같은 그 남편의 반복적인 권유로 그녀는 점차 시도 꽤나 많이 지으면서 그것을 또 자녀교육에 유용하게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서령수합 가정의 독특한 특징이라면 집안의 독서하는 분위기와 화락한 가풍인데 모든것을 남편과 안해가 함께했다는것이다. 남편은 집안살림에 관한것은 물론 학문이나 문학을 주제로 모두 안해와 함께했는데 후에 자녀가 생겨나자 또 부부가 언제나 자녀들과 함께 독서하고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형제들의 우애도 특별히 좋았으며 맏형이 동생들에게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을 만들어 &lt;&lt;홍씨독서록&gt;&gt;을 엮었고 둘째는 공부하기 위한 &lt;&lt;사부송유&gt;&gt;란 책도 만들었다. 둘째아들인 홍길주는 후날 그 당시의 집안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제 나이 스무살 이후에도 아버지께서 관아로 나가셔서 여가시간이 나면 어머니와 안방에 마주앉았다. 형님이 퇴근해서 나와 아우, 누이가 다 함께 어머니 앞에 빙ㅡ 둘러앉았다. 귀기울여 들은것은 모두 선인들의 훌륭한 행동이였고 토론하고 대화한것은 모두 경서와 사서의 아름다운 말이였다. 여유가 있을 때면 자주 시를 주고 받거나 글을 지어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고자 하였다. 그렇게 하루내내 즐겁게 지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자신의 고민이나 생각을 시로 지어 표현하자 그 부모도 같은 방식으로 자녀들에게 시로써 화답해주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하고픈 이야기를 시로 써서 주고 받았다. 영조, 정조, 순조대에 살았던 족수거사(足睡居士) 홍인모(洪仁謨, 1755~1812)와 령수합 서씨(令壽閤 徐氏, 1753~1823)부부, 그리고 그 자녀들의 특이한 가족풍경이다. 가히 명문가의 가정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상상할수가 있다. 딱딱하고 격식차린 량반의 집이 아니였다. 모범을 보이는 자애로운 부모와 이를 졸졸 따르는 자녀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이 련상된다.</b></h3><h3><b>&nbsp;&nbsp; 가문이 곧 권력이였던 조선후기, "풍홍달서(豊洪達徐)"는 최고가문의 대명사였다. 풍산 홍씨와 달성 서씨 ㅡ 두 가문은 고관대작과 18~19세기의 지식이 담긴 방대한 저술들을 폭포처럼 쏟아내였다. 서명응과 서유구, 홍석주와 홍길주... 등의 화려한 명함외에도 두 집안이 배출한 인재에는 녀성도 다수 보인다. 서령수합과 홍원주, 숙선옹주,&nbsp;리빙허각 등이 모두 이 가문의 사람들이다. &nbsp;&nbsp;&nbsp; 공동의 조상을 가진 부계혈족집단인 가문에서 녀자의 위치는 사실 애매하다. 가문의 정체성인 성(姓)이 녀자들을 이방의 존재로 취급하기때문이다. 하지만 가문의 내용은 적지 않게 녀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19세기초에 서령수합이 만든 홍씨가문도 그러하다. &nbsp;&nbsp;&nbsp; 달성 서씨 령수합과 풍산 홍씨 인모(1755~1812)는 슬하에 낳은 3남 2녀를 통해 가문의 전통을 만들어간다. 그들은 빙ㅡ 둘러앉아 강론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공동으로 한편의 시를 뽑아내는 놀이를 즐겼다. 각 절구을 누가 지었는지 명시한 련시(聯詩)가 이 집안의 문집에 여러편이 나온다. 부모, 형제, 자매가 시문(詩文)의 동인이자 학문의 동지인 셈이다. &nbsp;&nbsp;&nbsp; 령수합의 시에 "장아(長兒)"로 자주 등장하는 맏아들 연천 홍석주는 그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고 학문으로 일가를 이룬 학자관료이다. 부모를 뵈러 집에 들른 그는 “책상앞에는 형제자매가 모여있고/ 방 안에는 시서(詩書)가 벌려져있네./ 누이동생은 칠언시를 공부하고/ 남동생은 읽은 책이 엄청나구나!”라며 신나한다. 그는 이 모든것을 “시서를 읽어주고 문예를 강론해준 어머니" 서령수합에게 영광을 돌린다.</b></h3><h3><b>&nbsp;&nbsp;&nbsp; 서령수합이 "중아(仲兒)"라고 부르는 둘쩨아들 홍길주는 수학과 기하학 학자로서 관련한 저술서를 많이 냈다. 집안 조카 홍한주는 &lt;&lt;지수염필&gt;&gt;에서 “령수합은 수학에 통달했고 력학(曆學)과 기하학과 방정식을 자식들에게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고 홍길주도 7, 8세때 어머니에게서 배운 수학과 기하학이 자신의 학문의 출발점이 되였다고 말하였다. <br></b></h3><h3><b> 서령수합은 또 부마가 된 막내아들 홍현주에게도 부귀(富貴)를 경계하는 메시지를 주고 장녀 홍원주에게는 시를 통한 자기표현의 길을 열어주었다. </b></h3><h3><b> 자녀들 각자가 능통한 분야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에게 공통된것은 겸양과 검약, 가족애였다. 가문과 함께 떠올리게 되는 대를 잇기 위한 강박증이나 계보의식이 이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b></h3><h3><b> 어느 한번 국화꽃이 필 때 온다던 장아의 귀래(歸來)가 늦어지자 “어미새는 새끼를 부르느라 급하지만 젖먹이새는 둥지로 돌아옴이 늦는 법”이라는 서령수합,&nbsp;지성과 감성이 잘 어우러진 그녀에게서 사대부 녀성의 차분한 교양품격이 심심히 느껴진다.</b></h3><h3><b> 3남2녀를 둔 령수합은 자녀교육에 큰 열정을 쏟았는바 그들에게 학문과 력사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주었고 밤마다 자녀들이 읽은 책들을 점검하였다. 그런 피타는 노력과 열정 덕분에 후날 맏아들 홍석주(1774~1842)는 이조판서와 좌의정을 력임했고 조선 제24대왕 헌종의 사부가 되였다. 가문이 너무 잘 나가면 과(過)하다고 여긴 모친의 권유에 쫓아 둘째아들 홍길주(1786~1841)는 출사하지 않았지만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여 역시 문장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막내아들 홍현주도 너무 똑똑하여 12세때 정조의 딸 숙선옹주와 혼인했으며 정약용과 교유하면서 대학자로 대성했다. 장녀 홍원주는 후날 이름을 떨친 녀류시인이 되여 &lt;&lt;유한당시집&gt;&gt;을 남겼다. 남편 홍인모도 호조참의와 우부승지까지 력임하였고 경사(經史), 제자백가서, 음양, 의약, 복서 및 손오(孫吳)의 병법서, 로불(老佛)의 서적까지 박통하였으며 작품으로는 저서 &lt;&lt;족수당집&gt;&gt;과 고근체시(古近體詩) 2,000여편이 있는것으로 전해지는데 재능이 뛰여난 현모량처인 그녀를 가정의 보배로 각별히 아꼈다고 한다. "령수합(令壽閤)"이란 이름도 시집가서 남편이 지어준 당호인데 장수할 "수(壽)"자를 넣은것은 몸이 허약한 안해를 위한 건강기원과 배려심에서였다고 한다. 익히 알려져있듯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헛된것이 아님을 서령수합, 홍인모 부부와 그 자녀들이 잘 보여주고있다. 그녀가 지은 시가 생각외로 뛰여났지만 괴이하게도 그녀 본인은 녀성의 본분에 어긋난다 여겨 거의 직접 손으로 시를 쓰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이 아들들을 시켜서 옆에서 몰래 받아적게 하였다. 그렇게 되여 다행히 그녀의 시 191수와 사(辭) 1편이 후날 남편 홍인모의 시집인 &lt;&lt;족수당집(足睡堂集)&gt;&gt;에 "부록편"으로 남게 되였다. </b><br></h3> <h3><b> </b></h3><h3><b><br></b></h3><h1><b>&nbsp;&nbsp;&nbsp; 서령수합 시작품의 류다른 그 특점 </b></h1><div style="font-weight: bold;"><b><br></b></div><h3><b>&nbsp; 서령수합의 시는 격정적인 감흥보다는 평온하면서 넉넉한 여유를 주는 특징이 있는데 여기에는 가족전통을 만들어온 조선후기 사대부 녀성의 노고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b></h3><b>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나무우의 가을매미(遠樹晩蟬) / 서령수합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晴窓銜暮景, 幽興付殘篇;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寒蟬吟露葉, 知是近秋天.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맑게 개인 창문가에 저녁노을 비쳐들 때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도도한 그 여흥을 남은 시에 부치노라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이슬 맺힌 잎들에서 추운 매미 울어대니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어느덧 가을이 가까이 왔음을 알겠구나! </b><h3><b>&nbsp;&nbsp;&nbsp; 서령수합은 학문을 우선시하는 명문가에서 태여나서 자라면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고 숙성한후에도 좋은 남편을 만나 시집도 아주 잘 간&nbsp;보기 드물게 행운스러운 녀류시인이다. </b></h3><h3><b>&nbsp;&nbsp;&nbsp;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과거시험에도 못참가하는 녀자가 글을 쓰는 일을 별로 그리 썩 쓸모있는 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녀가 후에 시를 지은것도 결국 자녀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남편의 시에 화답해주기 위해서 시창작을 하였으므로 자녀들이 다 장성하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시를 더는 짓지 않았다고 한다. </b></h3><h3><b>&nbsp;&nbsp;&nbsp; 허란설헌이 만약 서령수합의 그 "배부른 모습"을 보았다면 얼마나 사무치게 부러워했을가...???! 참 세상은 너무나도 불공평하다. 그래서인지 여기서 자연히 허란설헌이 생각난다.</b></h3><h3><b>&nbsp;&nbsp; 허란설헌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김에 조선시대 녀성문학사에 빛나는 족적을 남긴 허란설헌과 서령수합 이 두 녀류시인의 시작품에 나타난 시의식을 두고 한번 비교해보고저 한다. </b></h3><h3><b>&nbsp;&nbsp;&nbsp; 허란설헌은 1563년에서 1589년까지 26년의 너무 짧은 생을 살았고, 서령수합은 1753년에서 1828년까지 75년의 천수를 누렸다.</b></h3><h3><b>&nbsp;&nbsp;&nbsp; 두 녀인은 모두 유교적 압박이 녀성에게 심하게 가해지던 조선시대에 명문가의 딸로 태여났으며 녀성의 독서를 허용하지 않던 시대였음에도 출가전에 학문을 익혔고 다시 명문가로 시집가서&nbsp; 사대부가의 부인으로 살다가 갔다.</b></h3><h3><b>&nbsp;&nbsp;&nbsp; 또한 집안의 배려로 시문집도 남아있는바, 허란설헌은 동생 허균이 그녀의 사후에 출간한 &lt;&lt;란설헌집(蘭雪軒集)&gt;&gt;에 수록된 시 210수가 전해지며, 서령수합은 또 남편 홍인모의 문집 &lt;&lt;족수당집(足睡堂集)&gt;&gt;에 "부록편"으로 첨부된 &lt;&lt;령수합고(令壽閤稿)&gt;&gt;의 시 192수가 전해진다. </b></h3><h3><b>&nbsp;&nbsp;&nbsp; 이렇게 비슷한 사회적 배경과 가정적 환경을 지녔으나 허란설헌과 서령수합의 시세계는 또 매우 다르게 표출된다. </b></h3><h3><b>&nbsp;&nbsp;&nbsp; 첫째, 녀인으로서의 삶에서 허란설헌은 출가전에 꿈꾸었던 랑만적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불행한 현실생활을 너무나 가슴아프게 갈등한다. 암담한 현실생활에서 해소되지 않는 그녀의 그 고독감은 돌아오지 않는 "님"에 대한 한(恨)이 되여버린다. 하지만 서령수합의 시작품속에는 "상사(相思)"의 정서가 묻어나지 않는다. 주어진 일상을 담담하게 받아들일뿐 외로움이나 서글픈 감정은 없다.</b></h3><h3><b>&nbsp;&nbsp;&nbsp; 둘째, 어머니로서의 삶에서 허란설헌은 슬하에 자녀를 남기지 못했다. 비록 어린 자식을 둘씩이나 낳았으나 얼마 못키우고 모두 잃었으며 배속에 임신하고있던 마지막 태아(류산)까지 합치면 셋이나 잃어버린 셈이다. 이러한 슬픔은 허란설헌의 시의 정서가 한(恨)으로 점철되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그러나 서령수합은 많은 시편에서 자식에 대한 대견함, 어머니로서의 근심, 훌륭한 인재가 되라는 훈계 등이 담겨있어 당시의 유교적 륜리규범에 충실한 어머니의 모습이 표출되고있다. </b></h3><h3><b>&nbsp;&nbsp;&nbsp; 셋째, 지선(至善)의 삶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허란설헌은 지배계층의 무능, 지배층에 희생되는 백성들, 신분차별의 부당함 등을 지적한다. 서령수합의 시에서는 사회적인 시각의 의식은 찾을수 없다. </b></h3><h3><b>&nbsp;&nbsp;&nbsp; 넷째, 일상의 일탈을 꿈꾸는 삶의 모습에서 허란설헌과 서령수합은&nbsp; 모두 그들 자신의 본향이 선계이며 그들은 거기서 살다 온 선인으로 인식하였다. </b></h3><h3><b> 허란설헌은 현실생활속에서는 그러한 리상세계에 다달을수 없고 가끔씩 꿈속에서야 그 선계에로 날아가 노닐었지만 서령수합은 선계를 동경하고 전원을 그리워하기도 하지만 그 리상세계가 어쩌면 바로 자신이 자식을 키우고 남편을 내조하며 이웃과 정을 나누는 현실의 "내집"임을 인식한다.</b></h3><h3><b>&nbsp;&nbsp;&nbsp; 이처럼 허란설헌과 서령수합은 비슷한 시대에 비슷한 가정환경속에서 살았으나 너무도 다른 시각과 의식의 모습을 표출한다. 이들의 서로 너무나 판이한 모습에서 그 어느 누구의 모습이 옳다든지 더 좋다든지 하는 말로 판단할수는 없다. </b></h3><h3><b>&nbsp;&nbsp;&nbsp; 이들이 보여준 두 세계가 모두 그들이 최선을 다해 살아낸 삶의 모습이며 녀성한시사의 빛나는 업적이기때문이다.</b></h3><h3><b><br></b></h3><h3><b>&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초생달을 보며(和杜初月) / 서령수합</b></h3><b>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羈鳥棲未定, 難爲一枝安;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林月初生影, 纖細掛雲端.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流光入懷袖, 中宵覺微寒;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遠客愁夕永, 坐看松陰團.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떠도는 새 아직은 둥지를 짓지 못해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한나무에서 안식을 얻기 어려워라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숲에서 막 생긴 초생달의 그림자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구름의 한끝에 섬세하게 걸려있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흐르는 그 빛이 소매속에 스며들고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밤이 깊자 으스스 추위도 느껴지니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먼길 가는 나그네 근심을 길게 하여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홀로 앉아 소나무 그림자를 바라보네 </b><h3><b>&nbsp;&nbsp;&nbsp; 우의 시는 초승달을 보면서 아직 둥지를 짓지 못해 깃들지 못한 새, 외로운 달, 소슬한 추위, 나그네를 통해 그 어떤 그리움을 담백하게 표현한 작품으로서 섬세한 녀인의 감수성이 빛나고있다.</b></h3><h3><b>&nbsp;&nbsp;&nbsp; 불행하고 요절했던 허난설헌에 비하여 서령수합은 자식들도 잘 기르고 남편과 금슬도 좋았다.</b></h3><h3><b>&nbsp;&nbsp;&nbsp; 서령수합은 남편 홍인모를 비릇하여 자식들과 자주 시문을 주고받았으며 주로 다른 사람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그녀의 시는 전문 단독시집으로 나오지는 못했지만 근 200수나 되는 방대한 수량의 시(</b><b>&lt;&lt;령수합고&gt;&gt;)가</b><b> 남편의 문집인 &lt;&lt;족수당집&gt;&gt;에 "부록편"으로 수록되여있다.</b></h3><h3><b><br></b></h3><h3><b>&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아들을 서울로 떠나보내며 운을 밟아 </b></h3><b>&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nbsp;&nbsp;&nbsp; (次韻送季兒還京)&nbsp;/ 서령수합</b><div><h3><b><br></b></h3><div><b>&nbsp;&nbsp;&nbsp;&nbsp;&nbsp;&nbsp;&nbsp; 星河漸落曉雲多, 萬樹烟霞似綠波;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鷄鳴將送漢陽客, 此別年年幾度過.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은하수 기울어서 구름 점점 많아지고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나무밑에 이는 안개 푸른 물결 같구나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닭이 울면 한양으로 떠나보내야 하니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해마다 이런 리별&nbsp;몇번이나 해야 하노? </b><h3><b>&nbsp;&nbsp;&nbsp; 서령수합의 시에서 특별히 특이한 점은 두보(杜甫)를 비롯하여 리백(李白),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도연명... 등 중국시인들의 시에 많이 차운(次韻)하여 많은 시를 창작하였다는 사실이다. 차운이란 자신이 즐겨 읽는 시의 시운(詩韻)을 본따서 시운을 맞추어 시를 짓는것을 말한다. 그녀가 차운해서 시를 지은것은 부녀자의 직분에 어긋나지 않은 범위내에서 저술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b></h3><b> </b><h3><b>&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큰 눈의 운을 불러(大雪呼韻) / 서령수합</b></h3><b> </b><h3><b>&nbsp;&nbsp;&nbsp;&nbsp;&nbsp;&nbsp;&nbsp; 輕花散蝶亂空飛, 銀樹瑤臺相映輝; </b></h3><h3><b>&nbsp;&nbsp;&nbsp;&nbsp;&nbsp;&nbsp;&nbsp; 野店山橋渾莫辨, 行人那得及時歸.</b></h3><h3><b>&nbsp;&nbsp;&nbsp;&nbsp;&nbsp;&nbsp;&nbsp; 허공중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꽃과 나비</b></h3><h3><b>&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은나무와 먼 루대도 서로 밝게 비춰주네</b></h3><h3><b>&nbsp;&nbsp;&nbsp;&nbsp;&nbsp;&nbsp;&nbsp; 들판 주막 산속 다리 희미하게 보이니 </b></h3><h3><b>&nbsp;&nbsp;&nbsp;&nbsp;&nbsp;&nbsp; &nbsp;행인들 어찌 제대로 돌아갈수 있으랴?! </b></h3><h3><b><br></b></h3><h3><h3><b>&nbsp;&nbsp;&nbsp; 아래의 시는 서령수합이 삼월삼짇날 답청(踏靑)을 가고자 차도구를&nbsp;준비하며 읊은 시이다. </b></h3><b> </b><h3><b>&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nbsp;&nbsp;&nbsp;&nbsp; 답청가 (踏靑歌) / 서령수합</b></h3><b> &nbsp;&nbsp;&nbsp;&nbsp;&nbsp; 몇해동안&nbsp;그 화로에 차를 끓여 마셨으니 &nbsp;&nbsp;&nbsp;&nbsp;&nbsp; 신기하고 묘한 공덕 틀림없이 있을터요 &nbsp;&nbsp;&nbsp;&nbsp;&nbsp; 차 한잔을 마신 뒤에 거문고를 뜯으니 &nbsp;&nbsp;&nbsp;&nbsp;&nbsp; 밝은 달이 나와서 누군인가 들여다보네 &nbsp;&nbsp;&nbsp;&nbsp;&nbsp; 봄날 차반 푸른 잔에 옥로차를 올리노니 &nbsp;&nbsp;&nbsp;&nbsp;&nbsp; 오랜 벽이 그을어서 얼룩그림 되였다네 &nbsp;&nbsp;&nbsp;&nbsp;&nbsp; 잔에 가득 찬것이 어찌 술 한잔뿐이랴 &nbsp;&nbsp;&nbsp;&nbsp;&nbsp; 답청가는 래일은 차호(茶壺)도 들고가리 </b><h3><b>&nbsp;&nbsp;&nbsp; 답청이란 삼월삼짇날을 이르는 말로서 녀성의 사회적 활동이 극히 제한되였던 시대에도 이날만은 바깥출입이 자유로웠다고 한다. </b></h3></h3></div></div> <h3><b> </b></h3><h3><b><br></b></h3><h1><b>&nbsp;&nbsp;어머니의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딸</b></h1><h3><b><br></b></h3><b>&nbsp;&nbsp;&nbsp; 조선 정조때의 녀류시인 유한당(幽閑堂) 홍원주(洪原周, 1791∼?)는 조선중후기의 그 여느 규방의 녀류문인과는 달리 호와 이름이 뚜렷이 남아있는 인물이다. 어머니 서령수합의 문학적 재능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녀류시인들가운데의 당당한 한사람이다. &nbsp;&nbsp;&nbsp; 그녀의 친정 집안은 명망있는 량반가문으로서 상술하다싶이 아버지 족수당(足睡堂) 홍인모(洪仁謨)는 관찰사와 우부승지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뛰여난 녀류시인인 서령수합이다.&nbsp;3남2녀가운데 맏딸로 태여났으며 이름은 원주(原周)이고 당호는 유한당(幽閑堂)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nbsp;&nbsp;&nbsp; 홍원주는 홍석주(洪奭周)와 홍길주(洪吉周)의 누이동생이며 숙선옹주(淑善翁主)와 혼인한 영명위(永明尉)인 홍현주(洪顯周)의 누나로서 형제 모두가 당대의 소문난 선비요 문장가들이다. 이처럼 형제들이 전부가 문학적 재능을 꽃피울수 있었던것은 어머니 서령수합의 영향이 컸음을 절대로 부인할수가 없다. &nbsp;&nbsp;&nbsp; 홍원주는 숙성하여 경기도 포천지역의 청송 심씨(靑松沈氏)가문에 출가하였다. &nbsp;&nbsp; 청송인(靑松人) 심의석(沈宜奭)에게 시집가서 친정(親庭)에서 오래동안 갈고 닦은 학문(學文)을 바탕으로 주옥(珠玉)같은 시를 많이 작시(作詩)하였다. &nbsp;&nbsp;&nbsp; 남편과의 금슬이 어떠한지 따로 특별하게 전해지는 이야기는 없는바, 홍원주는 후에 아들이 없자 심성택(沈誠澤)을 양자로 삼아 기르면서 어머니 서령수합처럼 현모량처로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nbsp;&nbsp;&nbsp; 또한 그녀는 어머니에 못지 않은 문학적 재능으로 문집 &lt;&lt;유한집(幽閒集)&gt;&gt;을 남겼다. 홍원주의 사후에 그녀의 양자 심성택(沈誠澤)이 그 유고를 모아 정리, 편집하였다. 표지에는 &lt;&lt;幽閒集(유한집)&gt;&gt;이라 쓰고 책표지안의 "서문" 머리에는 &lt;&lt;공인홍씨시집(恭人洪氏詩集)&gt;&gt;이라고 되여있다. &nbsp;&nbsp;&nbsp; 1권 1책(37장)으로서 목활자본이며 서문은 사위 리대우(李大憂)가 1854년(철종 5)에 썼고 발문은 없다. 5언과 7언의 장단시 187수가 수록되여있다. &nbsp;&nbsp;&nbsp; 그 내용은 평소의 겸양지덕과 천고의 규문의 교훈이 되는 이야기들이 꽤 있으나 친정형제들과 주고 받은 시와 어머니 서령수합처럼 당송시인들의 시에 대한 차운(次韻)이 많고 "구호16영(鷗湖十六詠)" 등과 같은 자연을 노래한 서정시가 주류를 이룬다. &nbsp;&nbsp;&nbsp; 특히 막내동생 홍현주(洪顯周)와 주고 받은 시가 류달리 많은데, 멀리에 시집와서 친정을 그리며 형제들과의 리별을 애달파하는 내용들이 많이 담겨있다. &nbsp;&nbsp;&nbsp; "꿈길에 고향 가다(夢歸)"라는 제목의 시에서는 꿈속에서 고향에 돌아가 부모형제와 함께 밤새도록 웃음섞인 이야기를 나누는 다정한 모습을 그리고 닭이 울어 잠에서 깨여서는 “바라건대 구름속의 기러기나 되여 훨훨 날아 고향에 가고싶구나!”라고 하며 애절한 그리움을 토로하였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꿈길에 고향 가다(夢歸) / 홍원주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隴西今夜月,&nbsp;應照故鄕明;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村春鳴遠野, 庭樹作秋聲.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오늘밤 둥실 솟은 서편 저 달은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내 고향을 밝게도 비추겠지요?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방아소리는 먼 들판까지 들려오고 &nbsp;&nbsp;&nbsp;&nbsp;&nbsp; &nbsp;&nbsp; 뜰안 나무엔 가을소리 요란하리라 &nbsp;&nbsp;&nbsp;&nbsp;홍원주의 시는 구구절절이 부모정(父母情), 형제애(兄弟愛), 규방의 고독(閨房孤獨), 부덕(婦德) 등을 녀인특유의 섬세한 정감으로 애절하게 읊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nbsp;&nbsp;&nbsp;&nbsp; &nbsp; 고향 그리며 피는 매화(惜鄕梅) / 홍원주 &nbsp;&nbsp;&nbsp;&nbsp;&nbsp;&nbsp; 千里歸心一樹梅, 墻頭月下獨先開; &nbsp;&nbsp;&nbsp;&nbsp;&nbsp;&nbsp; 幾年春雨爲誰好, 夜夜隴頭入夢來. &nbsp;&nbsp;&nbsp;&nbsp;&nbsp;&nbsp; 천리고향 가고싶은 한그루 매화나무 &nbsp;&nbsp;&nbsp;&nbsp;&nbsp;&nbsp; 달빛아래 담장가에 홀로 먼저 피였구나 &nbsp;&nbsp;&nbsp;&nbsp;&nbsp;&nbsp; 해마다 봄비는 누굴 위해 내리는가 &nbsp;&nbsp;&nbsp;&nbsp;&nbsp;&nbsp; 밤마다 베개머리 꿈속에서 찾아오네 &nbsp;&nbsp;&nbsp; 흔히들 "매화나무는 춥고 고통스러워도 그런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향기를 내면서(梅經寒苦發淸香)" 봄을 제일 먼저 알리는 꽃이라고들 하는데, 피여난 한그루 매화를 보고 문득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심경을 읊조린 시이다. &nbsp;&nbsp;&nbsp;&nbsp; 봄밤에 피리소리 들으며(春夜聞笛) / 홍원주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飄泊多年恨未歸, 誰家此夜擣征衣;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忽聞雲外落梅曲, 遠客彷徨雁北飛.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고향 떠나 반평생 돌아가지 못하는데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뉘집에서 이 밤에 입을 옷을 다듬는가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홀연히 구름밖에서 락매곡 들려오니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나그네는 배회하고 기러기만 북에 나네 &nbsp;&nbsp;&nbsp; 중국의 시선(詩仙) 리백(李白)은 "봄밤 락양성에서 피리소리 들으며(春夜洛城聞笛)"에서 “오늘 밤따라 리별의 곡 절양류(折楊柳)를 읊조리니/ 그 누가 고향 그리는 정 안일으키겠는가?(此夜曲中聞折柳, 何人不起故園情?)” 라고 읊조렸는데, 홍원주는 "락매곡(落梅曲)"과 "안북비(雁北飛)"를 넣어 더욱 시정(詩情)을 감명(感銘)깊고 곡진하게 표현(表現)하였다.</b> <h3><b> </b></h3><h3><b><br></b></h3><h1><b>&nbsp; 어머니와 다른 시세계를 구축한 홍원주</b></h1><h3><b><br></b></h3><h3><b>&nbsp;&nbsp;&nbsp; 홍원주의 묘는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길명리에 남편과 합장되여있다. 세상을 떠난 뒤에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였다.</b></h3><h3><b>&nbsp;&nbsp;&nbsp; 유감이라면 그녀가 아들이 없어 후사로 들이였던 양아들인 심성택마저도 자식이 없어서 결국 상필(相弼)을 입양하여 겨우 대가 이어진 집안이라는것이다.</b></h3><h3><b>&nbsp;&nbsp;&nbsp; 홍원주의 시세계는 어머니 서령수합과 왼전히 다른 면모를 보이면서 그 이채를 띤다. </b></h3><h3><b>&nbsp;&nbsp;&nbsp; 어머니 서영수합은 주로 자연(自然)에 대해 노래하였고 자녀 특히 아들에 대한 애틋함과 자긍심이 담긴 시를 많이 남겼다. 그런데 딸 홍원주에 대한 애절한 당부의 시가 없는 점이 좀 특이하다. </b></h3><h3><b>&nbsp;&nbsp;&nbsp; 반면, 홍원주는 시집가서도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하며 살았으며 그런 마음을 시로써 표현하였다. 특히 그녀의 &lt;&lt;꿈길에 고향 가다(夢歸)&gt;&gt;라는 시는 꿈속에서 어머니 곁으로 찾아가는 딸의 애잔한 모습을 아주 절실히 그리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크게&nbsp; 불러일으킨다.</b></h3><h3><b>&nbsp;&nbsp;&nbsp; 또한 홍원주는 그녀의 어머니처럼 두보의 시에 차운(次韻)하는 시를 여러편 썼다. 이렇게 차운하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방대한 시를 경험해야 한다. 때문에 홍원주 또한 상당한 량의 시들을 접했음을 알수 있다. 유한당이 쓴 두보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창작한 시들의 내용에 그것이 잘 나타나고있다.</b></h3><h3><b>&nbsp;&nbsp;&nbsp; 홍원주의 작품에는 당시 조선에서 녀성으로 살아가는 아픔, </b><b>한(恨), 가난</b><b> 등이 절실하게 표현된 시들이 없다. 이는 그의 집안이나 주변환경이 넉넉한 탓으로 추정된다. 또한 봉건사회 녀류시인들의 시들에 보편적으로 나오는 련인에 대한 원망, 실련이나 애정에 관한 표현들도 별로 없는 일종의 귀족적 시풍을 지녔다고 할수 있을것이다.</b></h3><h3><b>&nbsp;&nbsp;&nbsp; 홍원주의 시는 정서적이고 청신하며 구구절절 형제의 우애와 규방의 부덕, 규범 등을 읊고있다. 그녀의 많은 시들에서 섬세한 감성과 오감(五感)의 정서가 진하게 풍겨나온다. </b></h3><h3><b>&nbsp;&nbsp;&nbsp; 또한 유한당의 시체(詩體)는 력대의 그 어느 녀류시인이 남긴 시와는 달리 이체시(異體詩)를 남긴것이 신기하게 눈길을 끈다.</b></h3><h3><b>&nbsp;&nbsp;&nbsp; 아래의 홍원주의 시 "달이 뜨니 눈이 개네(月初出, 雪初晴)"는 한편의 시문에 삼자(三字)시와 오자(五字)시, 칠자(七字)시를 한데 붙여 쓴 특이한 시인데 아주 파격적인 시라고 말할수 있다.</b></h3><b>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月初出,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雪初晴;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庭柯生花白,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溪氷散玉明;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天地茫茫通一色,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星河歷歷報三更.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달이 갓 떠오르니 &nbsp;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눈도 개여오기 시작하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뜨락에 피여난 그 꽃은 희고&nbsp;&nbsp;&nbsp;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개울가 얼음은 옥처럼 맑아라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천지는 망망하여 한빛인데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은하수는 삼경임을 알려주도다... </b><div><h3><br></h3><h3><b>&nbsp;&nbsp;&nbsp;&nbsp; 주요작품으로는 &lt;&lt;봄밤에 피리소리 들으며(春夜聞笛)&gt;&gt;, &lt;&lt;동생을 아쉽게 떠나보내며 운을 밟아(次韻送舍弟)&gt;&gt;, &lt;&lt;꿈결에 고향 가다(夢歸)&gt;&gt;, &lt;&lt;동생을 아쉽게 떠나보내며(送舍弟)&gt;&gt;, &lt;&lt;차영명(次永明)&gt;&gt;, &lt;&lt;차두(次杜)&gt;&gt;, &lt;&lt;유녀(遊女)&gt;&gt;, &lt;&lt;차두강상(次杜江上)&gt;&gt;, &lt;&lt;고향을 그리며 피는 매화(憶鄕梅)&gt;&gt; 등이 있다. </b></h3><h3><b><br></b></h3><h3><b> 차운 사시(次韻 社詩-) / 홍원주 토지신에게 운치(韻)를 붙이며 官園芳草綠, 樹色遠天迷; 樓靜遠開戶, 林明鳥起樓. 山頭雲聚散, 攬外月高低; 有客尊無綠, 烹茶代酒携. 관아의 뜨락에 잔디풀 푸른데 나무빛도 하늘끝에 희미해라 고요한 다락에서 창문을 여니 숲이 밝아 새가 높이 날아오른다 산머리의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며 달님과 높낮이를 비기려 드는듯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푹 우리나니 술 대신 차(茶)를 끓여 대접하노라 </b></h3><h3><b> 신기하게도 중국의 차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은 </b><b>유한당(幽閒堂) 홍원주에게는</b><b> 평소 차를 무척이나 즐겨 마시는 한가지 독특한 애호가 있었다. </b></h3><h3><b> 유한당(幽閒堂)의 행복은 다도(茶道)를 즐기면서 사구(四句)의 칠언시(七言詩, 한구가 일곱글자씩으로 된 한시)와 팔구(八句)의 오언시(五言詩, 한구가 다섯자씩으로 된 한시)로 유한(幽閒, 녀인들의 그윽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는것이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고 한다.</b></h3><h3><b> 아마도 그래서 그녀의 호를 유한당(幽閒堂)이라고 지은것 같다. </b><br></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b> 그녀가 애용하는 차에 관한 시를 한수 더 보기로 하자. </b></h3><h3><b><br></b></h3><h3><b> 공경하며 운을 밟아(敬次) / 홍원주</b></h3><h3><b><br></b></h3><h3><b> 初開寶硯夜催詩, 星斗橫天月出履; <br></b></h3><h3><b> 掛燈閒坐高臺上, 看雪烹茶樂自知.<br></b></h3><h3><b> 보배벼루 처음 여니 밤이 시를 부르는데<br></b></h3><h3><b> 북두칠성 걸리고 달이 마실을 나오네 <br></b></h3><h3><b> 등잔불 켠 다락우에 그윽하게 높이 앉아</b><b> </b></h3><h3></h3><h3></h3><h3></h3><h3></h3><h3></h3><h3><b> 눈을 보며 차 끓이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b></h3><h3></h3><h3><b><br></b></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b>&nbsp;&nbsp;&nbsp;&nbsp;서령수합과 홍원주는 조선녀성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흔치 않은 모녀시인이다. 문학사상 가끔 몇편씩 소량의 시작품을 남긴 모녀시인은 꽤 있을수 있지만 각각 근 200수에 달하는 대량의 시작품을 남긴 모녀시인을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으뜸으로 서령수합(192수), 홍원주(188수) 모녀시인을 꼽아야 할것이며 그 버금으로는 리옥재(71수), 김호연재(시와 산문 200여편) 모녀시인일것이다.</b></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b> 그리고 우리 문학사상 부부시집을 출간한 녀류시인을 꼽으라고 하면 제일 처음으로 최초의 부부시집을 출간한 조선중기 리옥재, 김성달부부와 그후에 부부시집이나 마찬가지인 &lt;&lt;족수당집&gt;&gt;을 묶은 조선중후기의 서령수합, 홍인모부부라고 해야 할것이다. </b></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h3><b>&nbsp;&nbsp;&nbsp; 이 모든것은 조선시대 녀류시인들이 만들어낸 천태만상의 각이한 풍경속에서 또 나름대로</b><b> 특별하고 기이한 절경을 이루면서 그 풍광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더 즐겁게 한다... </b></h3></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