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3><br></h3><h3></h3><h3></h3><h3> 내 아버지는 내세울게 없는 분이셨다. </h3><h3></h3><h3> 아버지는 학교를 다닌적 없었고, 잘생김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수토로 인해 무릎관절이 튀여나와 걸음걸이가 평지에서 걸어도 언덕길을 오르듯 두 무릎에 바짝 힘을 주고 힘겹게 걸어야 했다. </h3><h3></h3><h3> 아버지의 별명은 자린고비였다.</h3><h3> 얼마나 깍쟁이였냐면, 가령 밥이 쉰 것 같으면 기어이 찬물에 헹궈서 꾸역꾸역 잡수셨고, 전날저녁에 삶은 옥수수국수가 이튿날이 되어 면발이 토막토막 끊어지면 숟가락으로 국수를 미음처럼 떠서 잡숫는 분이셨다. </h3><h3> 아버지는 하나에 십전씩 하던 담배종이가 아까워 평생을 우리가 쓰던 학습장을 찢어 그걸로 엽초를 말아 피시던 분이셨다. </h3><h3></h3><h3> 그런 아버지한테서 용돈을 받아 쓴다는건 정말 오금이 저려오는 일이였다. 용돈을 달라고 하면 아버지는 우선 용도를 물어보고 노란 궤짝을 열고 두터운 모택동 선집을 착 꺼내셨다. </h3><h3></h3><h3> 그리고는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기다리고 있는 내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신중하게 모택동선집을 펼치고는 장가가는 신랑이 입으려고 다려놓은 양복깃처럼 빳빳하게 주름 하나 없이 누워있는 돈중에서 가장 적절한 한 장을 고르셨다.</h3><h3> "돈이란게 얼마나 귀한건지 아냐? 이거 하나 벌기 위해서 아버지는..." 하고 시작되는 아버지의 그 돈 한 장이 오기까지의 험하고 어려운 과정을 듣는 일은 정말이지 지겨운 일이였다. 아버지 그 돈 안가질래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걸 꾹꾹 눌러가며 발에 쥐가 나도록 기다린 뒤에야 그 소중한 돈이 내 손에 쥐여질수 있었다. </h3><h3> </h3><h3> 아버지는 멋있는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였다. 내가 그렇게 질색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노상 바지가랑이를 양말안에 착 넣고 양말목을 길게 잡아당겨 바지가랑이를 감싸듯이 하고 다니는 사람이였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거울따위 와는 전혀 친하지 않는 사람이였다. 나는 한번도 아버지가 거울앞에서 옷맵시를 가다듬는걸 본적이 없다. </h3><h3></h3><h3> </h3> <h3> 아버지는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였다.</h3><h3> 어느 해인가는 아버지가 시내에 무슨 일로 가면서 몇시쯤 되면 외양간에 있는 꼴단을 헤쳐서 소한테 주라고 했다. 네네 했는데 그만 엄마도 우리도 그걸 까먹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여태 아버지 혼자서 소를 먹이는 일을 도맡아 하다보니 전혀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 그만 잊어버리고 만것이였다. 오후가 되어 버스로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노해서 펄펄 뛰더니 창고에서 시퍼런 낫을 들고 나가 집 아래 자류지 콩밭의 콩을 마구 베여서 소한테 먹이는 것이였다. </h3><h3> 덕분에 소는 생각지 않던 고급음식으로 한끼 배불리 먹었고, 우리는 속이 조마조마해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콩을 베는 아버지의 그 과격한 몸놀림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지켜 보아야 했다.</h3><h3> 다행히 뒤끝은 없는 성격이라 두어시간쯤 지나 화가 사그러 들었고, 덕분에 저녁밥은 무사히 먹었던 기억이 난다. </h3><h3> </h3><h3> 아버지는 자기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였다.</h3><h3> 우리 친구중에 머리가 정말 나빠서 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구구단을 떼지 못한 남자애가 있었는데 갸네 아버지가 이 집 막내딸 우리 며느리로 삼기요. 하는 롱담에 대뜸, 어디서 그런 돌대가리를 남의 귀한 딸한테 갖다 붙이오. 하면서 불같이 화를 내서 그만 두분이 얼굴을 붉힌적도 있었다. </h3><h3></h3><h3> 아버지는 지나치게 자기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기도 했다.</h3><h3> 학교에서 운동대회를 하면 당신 자식들이 참가하는 경기만 응원했고, 당신 자식들이 일등을 하면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고, 동네 집 애가 일등을 하면 대놓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공구량 바치러 가서도 꼭 우리 집 콩이 일등을 맞아야 기분이 좋아하고, 가령, 남의 집 콩이 일등을 맞고 우리 집 콩이 이등을 맞으면 대놓고 얼굴이 검으락 푸르락 해지면서 화를 내는 분이셨다. </h3><h3></h3><h3> 아버지는 당당하기도 했다.</h3><h3> 나이 48살에 막내딸을 낳아 보는 사람마다 손녀냐, 딸이냐 하고 물었어도 언제 한번 게면쩍어 하지도 않고 당당히 내 딸이오. 했고, 자식벌되는 젊은 부모들한테 전혀 기죽지 않고 어깨를 쫙 펴고 학부모회의에 참석해서 우리 딸만큼 머리 좋은 애가 어디 있냐고 우쭐하기도 했다. </h3><h3></h3><h3> 점잖고 멋있고 교양 넘치는 교과서적인 아버지를 꿈꾸며 성장기의 나는 아버지의 그 솔직함과 당당함을 창피해하고 심지어는 경멸했었다. 아버지의 인생은 지극히 소시민적이고, 참으로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했다. </h3><h3></h3><h3></h3><h3> 내 나이 마흔살, 아버지를 생각하며 가슴이 먹먹해진다.</h3><h3></h3><h3> 아버지는 나이 아홉 살에 엄마를 여의고, 13살에 여자아이 둘을 데리고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시집오고, 할아버지 환갑나이에 두분이 아들 하나를 더 낳다보니 사형제의 맏이가 되셨다. </h3><h3>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는 할머니가 데리고 온 여동생 둘과 스무살이 안된 삼촌을 기꺼이 끌어 안으셨다. 여동생 둘을 시집보내고 삼촌을 공부시켜 장가를 보내고 집까지 마련해주어 아버지가 못 다한 역할을 온전하게 해냈다.</h3><h3> 아픈데가 많은 안해였지만 언제 한번 얼굴을 찡그린적도 없이 좋다는 약은 다 사먹이면서 보듬었고 자식 넷을 키워내셨다.</h3><h3></h3><h3> 아버지의 어깨우에 놓여졌던 그 고단한 삶의 무게를 생각해 보는것만으로 다리가 휘청해난다. </h3><h3></h3><h3> 힘들다는 넉두리 한번 하지 않고 단단하게 자신의 삶을 마주하고 그 삶에 최선을 다한 내 아버지. </h3><h3></h3><h3> 아버지는 새벽같이 깨여서 여름이면 풀 좋은 들판을 찾아 소를 매고, 먼지가 끼여 거뭇거뭇한 얼음이 녹아내리는 초봄이면 속새풀을 수레가 안보이게 베여다가 소를 먹이고 아침밥을 먹기전에 서너이랑쯤은 밭기음을 매던 사람이였다. </h3><h3></h3><h3> 남들이 다 노는 농한기에도 돈이 될만한걸 기웃거려 광주리도 틀어서 팔고 낫자루도 해서 팔던 부지런한 사람이였다.</h3><h3> 학교는 못다녔지만 어깨너머로 깨친 글씨로 한어로 된 농약설명서도 알아보았다. 세상에 다시 없을 구두쇠였지만 공구량 바치러 시내로 가서는 당신은 식당에 가서 푸짐하게 한번 잡숫는 일 없이 시장통에서 순대 한그릇 사드시는걸로 대만족하시고, 온집식구가 같이 먹을 돼지고기 한토막, 애들이 좋아할 사탕 한근, 과자 두어근 사고, 책을 좋아하는 막내딸한테 골라골라 책두껑이 그럴사한 동화책을 사다주시던 아버지였다. </h3><h3> </h3><h3>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쯤 되어서는 당신이 죽으면 화장하고 골회를 그냥 날려버려라. 번거롭게 골회함 만들지 말고, 그리고 할아버지 묘는 내가 살아있을때까지만 제사를 지낼테니 내가 죽으면 그것도 하지 말아라 라고 하셨다. </h3><h3></h3><h3> 나는 그 말을 하는 아버지가 너무도 목소리도 크고 멀쩡해 보였음으로 흘려 들었었다. 헌데 정말로 며칠후 아버지는 갑자기 쓰러지셨고, 영영 일어나지 못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평소에 혈압이 높았냐, 아픈지 오래 된거 아니냐 하는 쟁론들이 있었다.</h3><h3> 평소에 자신은 돌도 소화시킬 정도로 위장이 튼튼하고 머리도 맑고 차돌처럼 건강하다고 큰소리를 땅땅 치던 아버지의 말을 곧이 듣고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 한번 시켜드리지 못했던 자식들은 그저 망연할 뿐이였다.</h3><h3> 닮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어쩔수 없이 당신의 고지식함을 닮은 당신 자식들은 당신의 유언대로 골회함도 만들지 못하고 아버지의 골회를 흐르는 강물에 그냥 날렸다. 할아버지의 묘지도 더 이상 찾지 않았다.</h3><h3></h3><h3> 20여년이 흘렀으니 아마 지금쯤은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면 풀을 베고 가토를 해가면서 아버지가 정성들여 가꾸던 할아버지 묘지가 이젠 평지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h3><h3> </h3><h3> </h3><h3> 조만간, 아버지와 함께 찾아갔던 기억을 되살려 할아버지 묘지를 한번 찾아가볼 생각이다. 평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할아버지 묘소에 술 한잔 붓고 큰절 한번 올려야겠다. </h3><h3></h3><h3> 그리고, 아버지께 말해주고 싶다.</h3><h3> 아버지, 당신은 내세울게 많은 분이라고.</h3><h3></h3><h3></h3><h3> 2018. 5.20 </h3><h3> </h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