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1 style="text-align: center; "><b><u><font color="#ed2308"><本文为作者原创文章></font></u></b></h1><h1 style="text-align: center; "><font color="#167efb"><b><br></b></font></h1><h1 style="text-align: center; "><font color="#167efb"><b>딸 기</b></font> </h1><div><br></div><div>퇴근하면서 시장을 지나다가 딸기 장사군들이 줄느런히 앉은 것을 보았다. 겨울에 비쌀 때는 한알씩 다칠세라 예쁘게 담아서 팔더니만 요즘은 제철이라 그런지 고를 것도 없이 마구 퍼담아서 팔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 아버지 나이쯤으로 돼보이는 한 아저씨가 아이 손을 잡고 딸기 사는 것이 눈에 띄였다.</div><div><br></div><div>잊고 있던, 아니… 어쩌면 부끄러운 내 마음을 잊고 싶어서 꼭꼭 묻어만 두었던 기억의 한자락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며 저도 모르게 죄책감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div><div><br></div><div>11살에 엄마를 암으로 잃고 계모의 손에서 큰 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많았다. 그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서도 멀리 떨어져 사니 어쩔수 없다는 핑게로 아버지 집으로 별로 다니지도 않았고 전화도 명절 때나 가끔 하군 했다. </div><div><br></div><div>자라면서 내가 계모의 모진 말을 듣고 괴롭힘을 당한 것이 어쩌면 아버지가 무능해서인 것 같아 괜히 아버지만 봐도 짜증이 나서 차라리 고아라는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는 못된 생각도 여러번 했었다. 사춘기 때는 서슴없이 그 생각을 입으로 번지기도 했다. 내 말에 상처입은 것 같은 아버지의 표정과 물기어린 눈빛을 보는 것이 오히려 깨고소해진 적도 있었다.</div><div><br></div><div>반항으로 똘똘 뭉쳤던 사춘기가 지나자 더 이상 아버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은 안했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회복되질 않았다. 결혼식도 번개불에 콩 닦듯 급하게 마치고는 누가 잡을세라 광주로 돌아가버렸다. 그리고는 몇년 동안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div><div><br></div><div>10년 전쯤… 아마도 지금 이맘때쯤 됐을 것이다. 세살 된 아이를 데리고 아이가 태여나서 처음으로 광주에서 연길로 왔다. 아버지한테는 계모 때문에 가기 싫었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얼굴을 보여줘야 될 것 같아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div><div><br></div><div>아버지는 재개발구역으로 확정된 단층집들이 늘어선 동네의 허름한 두간짜리 집에서 살고 있었다. 허름한 집을 보노라니 또 리유없이 아버지가 싫어났다. 남편한테 이런 집 꼬락서니를 보이는 것도 싫었고 계모의 그 탐욕스러운 얼굴을 보는 것도 싫었다. 나한테 보탬 하나 없이 오히려 손만 내밀 것 같은 가난한 집을 보니 그곳에 앉아있는 것도 싫어져 인상을 잔뜩 찌프린 채 밥도 먹네마네 했다.</div><div><br></div><div>아이를 보고 좋아하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척 외면을 했고 물어보는 말에도 단답형으로 대꾸해버리는 나 때문에 아버지는 역시나 상처받은 표정을 보였지만 나는 전부 다 가짜라고, 내 앞에서 연극을 하는 거라고 자신을 설득했다. 당신에게 우리 자매가 그렇게 가슴 아픈 딸이였으면 어릴 때 못된 계모 손에서 학대받으며 자라는 우리를 어떻게 보고만 있는단 말인가! 계모를 내쫓았어야지, 왜 불쌍한 내 동생을 시골 할머니네 집에 보냈는지… 원망만 가득 차 꽁꽁 얼어버린 내 마음을 녹이기엔 아버지의 누그러든 태도와 표정만으로는 역부족이였다.</div><div><br></div><div>얼음처럼 차거운 나와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아버지 사이에서 남편 역시 바늘방석에 앉은 듯 어쩔 줄 몰라했다. 나는 점심상을 물리기 바쁘게 남편을 재촉해서 문을 나섰다.</div><div><br></div><div>차 타러 큰길까지 나오는데 아버지가 검은 비닐주머니 하나를 불쑥 아이에게 쥐여주었다.</div><div><br></div><div>“언제 광주 다시 가니?”</div><div>“며칠 있다가…”</div><div>“그럼 집에서 며칠 더 놀다 가지, 애도 어쩌다 왔는데…”</div><div><br></div><div>아버지는 못내 아쉬운 눈길로 아이를 보며 며칠만 집에 더 있었으면 했지만 내 태도가 하도 랭랭하니 말끝을 흐리셨다. 나는 끝까지 모르는 척 아버지한테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잘 있어라는 말도 없이 택시에 앉아 얼핏 뒤를 보니 아버지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는 듯하였고 어쩐지 전보다 많이 왜소해진 것 같은 아버지의 실루엣에 잠간은 내가 너무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머리를 흔들었다.</div><div><br></div><div>그럴 리가… 아버지는 나랑 동생보다 계모가 더 중요해서 자식을 버릴지언정 집 나간 계모를 찾아오는 사람인데… 나는 애써 외면했다. 그러다 아이의 손에 쥐여진 비닐주머니를 열어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딸기가 절반쯤 차있었지만 짓이겨진 것이 더 많아 보여 처참할 지경이였다.</div><div><br></div><div>“아놔~ 이 따위 걸 애 먹으라고 준거야? 사려면 좀 좋은 거 고르지 뭐야 이게…”</div><div><br></div><div>나는 아이 손에서 주머니를 빼앗아 차에서 내리며 남편 모르게 그냥 길옆 쓰레기통에 버렸다.</div><div><br></div><div>그 후 몇년이 지나 나는 십년의 외지생활을 마치고 다시 연길에 돌아와서 정착했다. 혼자서 어린 아들을 데리고 출근하면서 아이의 온갖 뒤치닥거리에 지칠 때면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가 하는 생각을 하며 혼자 서럽게 이불을 쓰고 울어본 적도 여러번 있었다. 특히 아이가 아파서 밤중에 열이 펄펄 끓는 애를 둘쳐업고 혼자 병원으로 갈 때면 더더욱 서러움이 솟구쳤다.</div><div><br></div><div>그리고 그 순간, 리유없이 아버지가 떠올랐다. 서른 중반에 안해를 잃고 11살 짜리와 8살 짜리 코흘리개 두 딸을 데리고 살아가야 하는 한 남자… 남자 혼자서 어린 두 딸을 키우기엔 막막함과 절망만 가득 찼으리라… 원망하느라 눈 감고 귀 닫았던 지난날이 부끄러워졌다.</div><div><br></div><div>그렇게 한번씩 힘들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니 어느 순간, 몇년 전의 그 검은 비닐주머니에 담긴 딸기가 턱하니 응어리처럼 맺혀서 가슴이 체한 듯 아리고 답답했다. 또한 그 뒤로 몇년 동안은 딸기를 먹을 때마다 그 짓이겨진 딸기주머니가 생각나 마음이 괴로웠다. 그때 아버지의 형편으로 아픈 계모의 치료비를 대기도 힘들었겠는데, 돈도 별로 없어 석탄을 살 돈도 부족했을 텐데… 비닐주머니의 절반쯤 되는 딸기를 살 돈이면 아마도 며칠 채소값으로 아껴둔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여졌다.</div><div><br></div><div>자식이 있어봐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더니 혼자서 아이를 키워보면서 나는 비로소 아버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계모든, 친모든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는 것을 말이다.</div><div><br></div><div>결혼식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는 아버지보다 엄마가 나란히 앉아서 절을 받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동생의 결혼식에서 느꼈고 원망스럽기만 했던 아버지의 마음이 조금씩 리해되였다. 그럼에도 습관처럼 원망을 해온 내 고집은 쉽게 풀어지지가 않았다.</div><div><br></div><div>그 뒤로도 난 애써 그 괴롭고 미안한 마음을 꼭꼭 숨겨왔는데 한번씩 불쑥 떠올릴 때면 차마 딸기를 입안에 넣을 수가 없었다.</div><div><br></div><div>마흔을 바라보는 이제 와서야 철이 들기 시작하는지, 아버지의 늙어서 굽은 등이 보이고 주름으로 덮인 아버지의 얼굴과 흐릿해진 눈, 성한 이가 몇대 없는 아버지가 불쌍했다.</div><div><br></div><div>좋은 걸 먹을 때면 돌아갈 때 사다가 아이를 줘야지, 좋은 곳에 가면 나중에 시간을 내서 아이랑 놀러 와야지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해왔으면서도 아버지랑 한번 와야지, 아버지한테도 한번 사드려야지 하는 생각을 못해봤다.</div><div><br></div><div>생각해보니 정말로 난 빵점짜리 딸이였다. 언제 한번 따뜻하게 편찮으신데 없나 관심해본 적도 없고 항상 아버지는 건강하신줄로 착각하며 살았다. 설이나 명절에도 나 살기 힘들단 핑게로 급히 떠나느라 서둘렀고 대화자체를 거부했었다. </div><div><br></div><div>생신에조차도 손님처럼 시간 맞춰 식당에 가서 먹고는 형식적으로 아버지 친구들한테 술 한잔씩 따라 드리고는 임무를 완성했다고 생각했었다. 이젠 한상조차 차지 못할 정도로 해마다 적어지는 몇 안남은 아버지의 친구들을 보면서 마음으로는 놀라긴 했었으면서 말이다.</div><div><br></div><div>‘우리 아버지는 그래도 아직 정정하시네…’라는 자그마한 안도를 하면서도 나절로 그어버린 골을 넘지 못해서 항상 쌀쌀맞은 딸이 되였다. 이런 딸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진 그래도 친구들 앞에서 별로 잘난 것도 없는 이 큰딸을 자랑스럽게 소개시켜줬다.</div><div><br></div><div>자랑거리보다 문제투성이, 애물단지 딸임에도 내가 전처럼 사사건건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고 웃어주는 일이 조금 늘었다는 것만으로도 아버지는 무척 좋아하셨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아직도 차마 따뜻한 말을 건네지 못하고 여전히 매정한 말투로 아버지를 대한다. 낯이 간지럽다는 리유로 말이다.</div><div><br></div><div>물끄러미 딸기를 사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나는 주춤거리며 딸기장사군 앞에 섰다. 머뭇머뭇, 그동안 던져버렸던 검은 비닐봉지가 생각나 미안해서 잘 사먹지도 않았던 딸기를 주어담았다. 그렇게 아버지랑 같이 먹어야지 생각하면서 십여년 만에 처음으로 웃으며 딸기를 샀다.</div><div><br></div><div>오늘 딸기는 유난히 달 것 같다. 이젠 좀더 살가운 딸이 되여서 그동안 못되게 굴어 아프게 한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해드리리라. 가슴에 맺혔던 그 딱딱한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말랑말랑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젠 마음속으로가 아닌 입으로 아버지께 말해야겠다.</div><div><br></div><div>아버지, 건강하셔서 좋습니다 아버지의 딸이여서 좋습니다! 라고.</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