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3>赵南起同志逝世</h3><h3><br /></h3><h3>新华社北京6月18日电中国共产党的优秀党员,久经考验的忠诚的共产主义战士,无产阶级革命家,杰出的民族工作领导人,我军现代后勤建设的领导者,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第九届全国委员会副主席,中华人民共和国中央军事委员会原委员,中国人民解放军原总后勤部部长,原军事科学院院长赵南起同志,因病医治无效,于2018年6月17日23时12分在北京逝世,享年91岁。</h3><h3><br /></h3><h3>赵南起同志1945年12月参加革命工作,1947年2月加入中国共产党,1988年9月被授予上将军衔。</h3> <h1>조남기장군은 1927년 4월 충청북도 청원의 독립운동가 가정에서 태여났다. 일제 탄압으로 가족들은 길림성 영길현 차로하에 정착했다.<br />18세 나이인 1945년, 조남기는 중국공산당 동북민주련군의 부사령관인 주보중중장을 만났고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에서 장교로 공부하는 기회를 가졌다.<br />조선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그는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 작전처 참모로 조선에 파견되여 조선과 중국 고위관계자 통역을 하거나 사령부가 발령하는 작전명령서를 일선부대에 직접 하달하는 일을 맡았다.<br />팽덕회 사령관의 숙소 바로옆에다 숙소를 배정받았고 로씨야어통역으로 있는 모안영과도 알게 됐다.<br /></h1> <h1>조남기는 1951년 중국인민지원군 후방근무 사령부로 발령받아 항미원조가 끝날 때까지 군수품의 일선수송에 대한 실무책임자 역할을 맡았다.<br />1966년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연변에도 불똥이 튀였다. 처음에는 문화혁명에 대해 호감을 가졌던 그는 지나친 무질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문혁파와 대립각을 세우게 됐다.<br />모주석의 조카인 모원신이 연변의 문혁활동을 주도하고 조선족의 대표인사인 주덕해를 타도하려 했다. 이에 조남기장군은 주덕해를 북경에 몰래 보낸후 모원신의 공격을 받아 공직에서 물러났다.</h1> <h1>총후근부 부부장 겸 부정치위원이던 조남기는 유력한 승진후보였다. 그러나 연변의 일부 퇴직간부가 닉명으로 중앙군사위원회에 투서해 '조남기는 자신의 동생이 현재 한국에 살고있는것을 숨기는 등 그동안 한국의 간첩으로 일했다'고 했다.</h1> <p><span style="font-size: 20px;">중앙군사위 지시로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조사반이 장춘과 연길로 파견돼 철저한 조사를 거친 끝에 마침내 "무혐의 판정"이 나왔다.</span></p><p><span style="font-size: 20px;">루명을 벗는 과정을 순조롭게 처리했던 덕분에 조남기는 그해 10월 북경에서 열린 공산당대표대회에서. 양상곤부주석의 부름을 받고 사실상 총후근부 부장에 배정됐다.</span></p> <h1>1972년 주은래총리가 조선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북지방에 들려 "조선족 간부들을 외국 간첩으로 몰아세우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한뒤 조남기의 정치적 생명도 부활을 맞았다.<br />1987년은 조남기에게 인생의 또 하나의 전환점이다. 그해 10월 열리는 중국공산당 제13기 전국대표대회를 계기로 대대적인 군부 인사변동이 단행될 예정이였다.<br /></h1> <h1>1988년 4월 조남기장군은 중공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됐으며 9월14일 중국인민해방군 상장으로 승진됐는데 당시 17명 고급장령중 유일한 소수민족 출신이였다.<br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조남기장군은 중국인민해방군 군사과학원 원장직을 담임했으며 1998년부터 2003년 3월까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직을 담임했다.또한 중공중앙위원회 제12기, 제13기, 제14기 위원이며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민족위원회 부주임 위원이다. 2003년 3월 조남기장군은 공직에서 은퇴했다.</h1> <p>他本是朝鲜人,却为中国做了很大贡献,后来被授上将,让人敬佩</p><p>我国地大物博,文化深远,如今科技、经济等方面又发展迅猛,自然吸引了不少外国人前来定居。我们看非诚勿扰也可以知道,很多外国人都非常喜欢中国,把自己当成了中国人,在中国生活,结婚。而今天要讲的这位,是个朝鲜人,他同样是来到我国生活。而了不得的是,他为中国做了很大贡献,后来被授上将!</p> <p>他就是赵南起,1927年在朝鲜出生,因为他的爷爷和父亲非常喜爱中国,所以他深受影响。由于战争,他在国内四处逃窜。于是此时他父亲想,不如就趁这个机会去到中国避险吧,于是全家逃到了中国的境内,安居下来。他当时才十几岁,在我国环境的影响下,更加喜爱中国的风土人情,努力学习中文,融入邻居生活,很是开心。所以即使是战争结束,也不回国。他不仅没有回国,还将自己当成了中国的一员,全心全意为人民服务,以毛主席为榜样,并且加入了共产党。之后他被派去扫除日寇余孽,做出了重要的贡献。当时部队粮食缺少,部队急得像热锅上的蚂蚁,此时他义无反顾发动朝鲜族捐了近30万斤粮食,这简直就是雪中送炭啊!</p> <p>之后他又凭着自己的努力争取到在农业工作组工作,这对一个外国人来讲是比较困难的。本来以为他可以在自己喜欢的农业方面安安稳稳地干下去,没想到朝鲜战争爆发了。虽然他已把自己当成中国人,但是对于朝鲜他也是非常关心的。在得知我国要援助朝鲜时,他马上就报名了,在战争中担任联络人的工作,负责翻译和联络。因为他的努力和能力,所以他年仅二十三时就做到了正团级干部。战争结束后,对他十分欣赏他的彭德怀将军便问他想不想留在朝鲜工作,回到家乡。他毫不犹豫地表示他想留在中国,不想回到朝鲜,但是朝鲜同样是自己的家乡,家乡今后有事,他依旧会帮忙。</p> <p>正是因为他十分吃苦耐劳,为人又重情重义,所以很多战友喜欢他。没过多久他就因为自己的能力成为军委的一份子,还被授予上将军衔,一时间前途无量,官运亨通。他晚年的时候还曾回过一次家乡,当时朝鲜许多百姓还出来欢迎他。但是当记者激动地问到他是不是回来安享晚年,落叶归根时,他笑了笑,坚定地表示自己是中国人,之后要回中国生活。</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