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3> 오늘은 정월 보름날이다 오후 우리 부부는 지난해에 이어 다시 유람키로 하룡촌에 자리잡은 동래사로 향하였다 쭉뻣은 장백산동로 를 빠져나와 작은산굽 몇개돌아 하룡촌입구에 도착하니 다리 아래로 해란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발전소에서 쏟아내린 강물은 추운 겨울인데도 얼지 않은채 강 바닦을 스치며 흘러 내린다 참 좋은 풍경이였다</h3> <h3><font color="#010101">강아래 먼산 사이로 연길개발구 모퉁이가 보인다 해란강은 이 곳에서 부르하통하와 만난다</font></h3> <p class="ql-block">다리에서 조금 더 들어가니 하룡촌에 도착했다 푸른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포근한 마을 정경이였다 조선족 음식점 간판이 마을 곳곳에 보인다 토닭집 을 시작하여 요즈음은 노래방 강변 놀이터까지 들어서서 유람지로선 관광객들에겐 인기만점 ! 나들이 손님들이 즐겨 찾는단다</p> <h3>이마을은 원래 룡정시 석정공사의 마감 동네였다 엎드려도 연길시가 코닫는 곳 이였건만 해란강과 부르하통강에 가로막혀 소수레 도 못 통하는 달 동네였단다</h3> <h3>그러던 어느날 하룡촌은 개혁개방을 계기로 행정구역이 연길시에 편입되면서 서서히 빛을 보게되였다 강위엔 다리도 생기고 마을길도 포장길로 탈바꿈 하였고 마을 중심엔 거대한 주차장도 들어섰다 </h3> <h3>14번 시내뻐스도 통하고 택시도 부를수 있어 방문객에겐 아주편리한 교통 여건</h3> <h3>곳곳에 나붙은 음식점 노래방 간판은 여기가 명실부합 의 놀부네 동네 라고 말해준다</h3> <h3>인젠 단층 집들도 점차 설 자리를 잊고 층집과 가든들이 그자리를 메우고 있단다</h3> <h3>마을 주차장 옆 검정기와 정자가 보인다 이곳은 지난 오랜사이 천년송을 보러오는 유람객들을 맞이하는 출입구였다 그런데 어쩐걸 !고송이 사찰안으로 편입되면서 그 기능을 잃고 고물로 전락하였다</h3> <h3>천년고송이 입 김처럼 소문이 퍼지자 먼곳의 불교 신자들까지 찾아들었다 관광 손님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봄 여름 가을 세 철은 춤 노래로 야단 법석이란다 마을뒤 상덕산 뒷 자락 해란강 기슭에 규모급의 골프장이 들어섰다 이로서 소하룡 풍경구는 해란호 풍경구로 이름을 바뀌였다 2007년에 국가A급 풍경구로 평의받았다</h3> <h3>마을뒤 산간도로 하룡촌~마패촌21km</h3> <h3>포장길로 3km 정도 올라가면 상덕산 등성이 관망대에 서면 산아래로 해란호 골프장이 한눈에 잡힌다</h3> <h3>2012년 여름에 착공하고 2017년에 시공을 마친 불교사찰은 해란강 풍경구에 또 다른 이미지를 부여하였다 신도들의 공부의 장소였으며 유람객들의 휴식의장소 이기도 하며 룡산공룡곡(龙山恐龙谷)과 같은 굵직한 관광코스 개발이기도 하였다</h3> <h3>전통불교 사찰은 남북 방향을 선호 하지만 이사찰은 동서 방향이다 삼태자 고송이 상덕산 서쪽비탈에 자리 메김하였기에 사원전체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였다 또 사찰이 연길시 동쪽에 있고 부처님이 동쪽에서 온다하여 동래사(东来寺 )라고 명칭을 부여 받았단다</h3> <h3>사찰입구에 가보니 넓고도 정교한 높은계단이 반가히 맞아주었다 오늘은 비록 한적한 겨울 날씨건만 삼삼오오 짝지어 온 나들이 손님들이 눈에 띄였다</h3> <h3>가람은(伽蓝)한대 (汉代)사찰에서 기축을 이르는 중심을 말하는데 이는 동래사의 가람이다</h3> <h3>90단계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동래사(东来寺)현판이 돗 보였다 </h3> <h3>동래사 의 전경이다 가람에서 층계따라 올라가면 정면은 천왕전(天王殿) 뒤로는 차례로 약사전 (药师殿)대웅보전(大雄宝殿)장경각( 藏经阁)이 있다</h3> <h3>대웅보전(大雄宝殿)은 불교 사찰중에서 제일 중요하고 제일 방대한 건축이다 대웅(大雄)즉 불교 석가모니이다 동래사 대웅보전은 汉代사찰 전통을 본 밭아 석가모니 삼불상 을 모셨다 한다</h3> <h3>석가모니 삼불상</h3> <h3>관음전 에 모셔진 관음 보살</h3> <h3>역사적으로 중국건축은 예술적 특색과 기법에 있어서 다른 나라와의 교류를 중요시 했으며 일본 조선반도 와 베트남 등 동남아 지역나라 건축에 커다란 영양을 미쳤다</h3> <h3>사찰은 중국 불교건축의 하나이다 인도에서 기원된 사찰건축은 북위(北魏)때부터 중국에서 흥성하기 시작했다</h3> <h3>중국 사찰건축들은 중국 봉건사회의 문화의 발전과 종교의 흥망을 기록하고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가 있다 동래사찰은 한나라 시대의 사찰을 본따 설계되였단다 </h3> <h3>중국 고대사람들은 건축구조에서 깊은 음양 우주관과 대칭,질서 안정을 숭상하는 심미심리를 보여주고있다 동래사 건축물들이 보여 주다십히 참으로 아름답다</h3> <h3>이러한 미의 감상은 우리 연변 사람들에겐 낮 설기만 하다 옛날 북경(雍和宫)이나 락양(白马寺)이나 외 지방에서만 볼수있던 인문경관 이였기 때문이다 </h3> <h3>나는 불교신도가 아니다 내가 동래사를 다시 찾은온 이유는 오직 하나 ~중국 고대건축의 미를 감상하기 위해서 이다 그것도 고향 연길에서</h3> <h3>유람을 하느라면 나는 어쩐지 그곳 인문지리 에 많은 관심을 갖게된다 관광이 곧 역사공부요 관광이 곧 자연탐색이라는 말이 나에게는 좀더 통하는가 보다</h3> <h3><font color="#010101">마을 앞 부르하통하 를 사이두고 우둑솟은 성자산(城子山)이다 이 산속에 1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산성(山城)과 10여년 역사를 기록하는 동하국 (东夏国)수도 남경(南京)있었단다 </font></h3> <h3>698년 에 대조영이 세운 발해 로부터 시작하여 건설한 성자산성은 1616년 청나라 초반까지 천년이란 오랜기간 주인은 수없이 바뀌어도 이 지역 관문 역활을 톡톡히 하였다 ,여기 포인트는 왜 이곳에 산성을 쌓아을까?물음표를 던져밨다</h3> <h3>실물로 보는 성자산 입구이다 산중턱 중심 다소 안온한 평한 구역이 궁궐 등 건물터로 보인다</h3> <h3><font color="#010101">고을에서 경성으로 통하는 관문이 아닐가 추측된다 발해228년역사에서 22년간 동안 수도를 화룡서성 과 훈춘 팔련성에 옮긴기록이 있다,이를 감안하면 성자산은 요새화된 병참 또는 물류중간거점 등 공능을 가진 교통 관문일 것이다 </font></h3> <h3><font color="#010101">곡물을 국가 납세품목으로 규정한 고대 농경사회 에서 곡창으로 불리는 해란강 평강벌과 부르하통하 연길분지 물류는 주로 달구지나 소수레에 의거 했을것이고 또 빙판길을 많히 이용해 먼곳 경성으로 전달 되였을 것이다 옛날연변은 지금과 달리 삼림도 무성하고 강바닥에 물이 많았을 것이다 </font></h3> <h3>그 나들목 (关卡)이 바로 소하룡(小河龙) 합수목 인 것이다 경성인 동경성 으로 갈려해도 빙판길 따라 마반산 협곡을 빠져 나가면 도문시 하가촌에(下嘎村) 이른다 이곳에서 곳바로 동경성과 연결되는가야하를 만난다 만난물은 큰강을 이루어 두만강에 흘러든다 이것이 팩트다 고대사람들이 물 나들목에 바로 군사요새를 설치한다는것…이런 해석이 연길 성자산 관문을 설치한 정답이 아닐까?</h3> <h3>기록에는 해란강 과 부르하통하가 이곳(小河龙)에서 합친후 성자산성을 에 돌았고 산등성은 험난하여 이수난공(易守难攻)요새였단다 장강 삼협에 자리한 초(楚)나라의 군사요새 백제성(白帝城)을 방불케한다</h3> <h3><font color="#010101">산등성이 담벽의 둘레 길이는 4.5km 달했고 담벽 높이는1~3m 산세를 타고 말발굽형으로 쌓였고 북쪽 동북쪽 두 골짜기 어귀엔 사람이 드나드는 옹성瓮城이 있었단다.동남문은 산 마루에 세웠지만 옹성은 없고 성안 으로 갈z자로 된 쫍은길이 산등과 이어졌고 서문은 성밖으로 八자형 방어 공사가 있었단다</font></h3> <h3>산성에 들어 가려면 입구에 설차한 옹성을 거쳐야 한다 무엇을 옹성이라 하는가? 한국 수원산성 옹성이다 </h3> <h3>옹성 즉 성곽의 대문인데 외부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하여 대문 외각에 단지 (翁)모양의 성벽을 붙혀쌓았다 </h3> <h3>산성 안은 어땟을가? 궁전과 큰 규모 서민 주거지 유적이 발견되였다 황궁터엔 아홉단계 집터 자리가 메김하고 있단다 매단계의 넢이가 10m 길이17m 궁전의 규모를 추측할수 있는 대목이다 </h3> <h3><font color="#010101">이웃 욕지산(浴池山)에선 왕이 쓰던 욕지유적 도 발견하였단다</font></h3> <h3>역사 기록엔 원래 금나라 료동선무사 였던 포선만노(蒲鲜万奴)가 금나라 탈리해 1216 년 함경북도 길주를 에돌아 이곳 성자산에서 동하국이라이란 국호를 가진 자립국가를 건립하여 왕으로 자칭 하였단다 1233년 몽골의 진공으로 그는 성자산에서 포로되였고 또 일생을 마감 하였단다</h3> <h3>그후 여진족이 통치하던 청나라에서 연변 지역을 300년 동안 사람이 못살도록 봉금(封禁)하면서 성자산도 그 면목을 다시 찾지 못했을 것이다</h3> <h3><font color="#010101"> 비록 사람은 가고 궁궐은 자취 감췄건만(人去镂空),동래사찰에 1000년 저 소나무는 말한다 성자산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자기가 알고 있다고……</font></h3> <h3>이로서 대보름 날 사찰기행은 끝낱다 사찰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서쪽 하늘가 두터운 구름속에서 뚫고나온 귤빛 섬광을 보았다 유괘한 관광 유람이였다 좋은 한해가 되였으면…기원한다</h3>